작자 미상의 어초문답도
漁樵問答圖 [어초문답도 작자 미상] 족자 비단에 담채. 58.7 x 43.0 cm.
조선시대 어초문답도 네폭 중 두번째 포스팅.
조선시대 청록산수화는 이상향을 꿈꾸는 산수화와 고사인물화,
왕실의 위엄과 권위적인 의미를 지닌 궁중장식화와 기록화,
부귀와 장수를 기원하는 민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표현된다.
청록산수화 중 금으로 장식한 그림을 특히 금벽산수화(金碧山水畵)라고 부르는데
전 진재해 필 잠직도에서 금 성분을 밝혀내는 성과가 있었다.
화려함과 섬세함이 돋보이는 청록산수화는 수묵산수화와 달리 청록색의 광물성 안료를 사용,
화려한 채색과 정교한 기술로 제작되어 생동감이 뛰어나다.
작가 미상의 어초문답도(漁樵問答圖)는 속세에서 떨어져 사는 선비를 어부와 나무꾼에 비유했다.
초자연의 이상향에서 머물고 싶어 했던 사대부의 마음을 보여준다.
속세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선비를 어부와 나무꾼에 비유하여 초자연적인 이상향을 나타내는가 하면
장생불사(長生不死)의 꿈을 십장생에 실어 신선들이 사는 낙원을 표현하기도 한다.
나뭇단과 장대를 함께 소나무 아래에 부려놓고 허리춤에 도끼를 꽂고
소나무 둥치 위에 걸터앉은 초부(樵夫 : 나무꾼),
갓이 떨어진 삿갓을 쓰고 바구니와 낚싯대를 너럭바위에 내려놓고
바위 끝에 앉아있는 어부(漁夫)가 물가를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림의 초부는 보통 나무꾼이 아니라 산수 자연을 좋아해서 신에 묻혀 사는 지자(智者)의 상징형이며,
어부는 단순한 고기잡이가 아니라 강호 자연속에서 낚시로 세월을 낚는 인자(仁者)의 상징형이다.
말하자면 이들은 다같이 물외한객(物外閒客)으로서
세속을 멀리하고 산수간에서 유유자적하며 한거(閑居)하는 은일자들의 화신인 것이다.
산과 물에서 자연을 벗하며 살아가는 '소요유(逍遙遊)의 삶' 을 그린 셈이다.
옛 선비들은 나무하는 일이나 고기 잡는 일에 무관하면서도 스스로 초부나 어부로 자처하기를 즐겨하였다.
그래서 호(號)를 짓되 초부(樵夫), 초수(樵叟) 또는 초은(樵隱)이라 하여 스스로 숨어사는 나무꾼인양 하였고,
어은(漁隱), 어은재(漁隱齋), 어일(漁逸), 어적산인(漁適散人), 또는 어초자(漁樵子)라 하여
스스로 숨어사는 어부임을 자처하였다.
따라서 이들이 다루는 물곡나 나무는 인재를 뜻하는 것으로
마땅한 인재를 알아보고 났거나 캐내는 일을 비유하기도 한다.
이처럼 선비들이 스스로 초부나 어부로 자처했던 것은 평소에 산과 강호에서 채산조수하면서
자연을 즐기며 고답(高踏)을 추구했던 예 성현들의 삶을 흠모해 마지않았고
또 자신 스스로도 그러한 경지에 들어 있음을 은근히 내세우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논어에서
'지혜로운 사람(智者)의 즐거움은 물과 같고, 인자한 사람(仁者)의 즐거움은 산과 같다.
지혜로운 사람(智者)은 동(動)적이고, 인자한 사람(仁者)은 정(靜)적이다.
지혜로운 사람(智者)은 즐겁게 살고, 인자한 사람(仁者)은 장수한다.' 라고 했다.
숙종이 내린 어제(御題) 1715년, 숙종 41년
兩個有人張與李 [양개유인장여이] 속세에 평범한 장씨와 이씨 두 사람
腰間一斧手中鯉 [요간일부수중리] 한 사람은 허리에 도끼를 차고, 한 사람은 손에 잉어가 있다네.
酒酣何事來河邊 [주감하사래하변] 술 기운이 얼근히 올랐는데 무슨 일로 강가로 왔는가?
應語樵漁害利耳 [응어초어해리이] 나무꾼, 어부와 주고받은 말은 해(害)와 이(利)에 대한 말이라네.
歲在乙未中秋下浣題 [세재을미중추하완제] 을미년 8월 하순에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