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성지 순례(2011.2.02)
북한산성과 함께 수도 한양을 지키던 조선시대의 산성이다. 이괄의 난을 겪고 난 인조 2년(1624)이다.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으로 갖춘 것은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그 뒤 계속적인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시설은 동·서·남문루와 장대·돈대·보 등의 방어시설과
비밀통로인 암문, 우물, 관아, 군사훈련시설 등이 있다.
남한산성은 각종 시설이 잘 정비되어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이 잘 된 곳으로 손꼽힌다.
아름다운 남한산성 행궁
1625년 인조 3년에 완성되었던 남한산성 행궁은,
병자호란때 인조 임금이 피란하여 직접 47일 항쟁했던 곳이며
19세기 말에는 의병 항쟁의 거점이기도 했었다.
그래서 일제는 이곳을 철저하게 훼손하여
1930년대에는 행궁의 초석만이 겨우 남겨졌던 아픔을 겪은 곳이다.
지난 10년간의 복원공사끝에 지난 10월 24일 마침내 386년전의
행궁 모습이 완공되었다.
단청 마무리 공사는 올 하반기에 완료된다고 한다.
▲ 남한산성 옛모습 지도
▲ ▼ 행궁성 옛모습
▲ 행궁성 복원도
▲ 남한산성 行宮(행궁)의 정문인 한남루(옛모습)
▲ 복원된 한남루
▲ 연 못
▼ 문 서 고
▲ 행궁성 (하궐) 옛모습
▲ ▼ 행궁성 (하궐) 복원
▲ ▼ 행궁 주춧돌 및 기와장 발굴
▲ 기와장 발굴 (신라시대때 제조됨 : 장당 20Kg), 보통 기와 3~4Kg
▲ 행궁 상궐(옛모습)
▲▼ ▲ 복원된 행궁 상궐 옆모습
▲ 종묘(조선시대 역대 임금과 왕비,죽은후 추존된 왕, 왕비의 신위를 모시는 사당)
▲ ▼ 정 각
▲ 행궁에 있는 오래된 느티나무에 왠지 자꾸 눈길이 간다. 300년전의 행궁을 복원해 놓았는데 새로 심은 나무들만 있으면
얼마나 안어울리겠나? 오래된 나무가 그래서 좋다.▲ ▼ 연무관 궁터
▲ 성벽 옛모습 (우측의 탑은 이승만 대통령이 세운 기념탑,현재 땅속에 묻혀있음, 시민들의 반발로 복원 못함)
0. 수어장대(守禦將臺)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로 수어장대는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은 누각이다. 남한산성에 있던 5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있으며, 성 안에 남아 있는 건물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다.
인조 2년(1624년) 남한산성 축성 때 단층으로 지어 서장대라 불리던 것을
영조 27년(1751년) 유수 이기진이 왕명을 받아 이층으로 다시 짓고 "수어장대"라는 편액을 달았다.
수어장대 2층 내부에는 "무망루"하는 편액이 달려 있었는데,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혔다가 귀국하여 북벌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지은 것이다. 현재 무망루 편액은 수어장대 오른편에
보호각을 1989년에 지어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보관하고 있다.
▲ 수어장대 옛모습
▲ 무망루(無忘樓), 우측의 전나무는 이승만 대통령 기념식수
▲ 제 6 암문
0. 남문(南門, 至和門)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이 있는데, 남문은
남한산성에 있는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으로 현재에도 출입이 가장 많은 곳이다.
선조 때의 기록을 보면 동문, 남문, 수구문의 세문을 수축하였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남문은 인조 2년(1624년) 수축되기 이전부터 이미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남문은 정조 3년(1779년) 성곽을 보수할 때 개축하고 지화문(至和門)이라 하였다.
1976년 문루를 복원하였고 2009년 정조의 글씨를 집지하여 전면에 현판을 설치하였다.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처음 남한산성에 들어올 때 바로 이 문을 통해서 들어왔다.
▲ 남문 옛모습
▲ 정조3년 성곽을 개보수할때 지화문이라 칭하였고 4대문중 가장크고 웅장한 중심문이며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다.
[삼전도에서 항복하는 인조, 삼전도비]
삼전도(三田渡)는 조선 시대 한강 상류에 있던 나루터이다. 오늘날의 위치로는 서울특별시 송파구 삼전동 부근이다. 이 부근의 한강을 삼전도라고 칭하기도 했다. 1637년 1월 30일, 조선 인조가 이곳에서 청나라와 굴욕적인 강화 협정을 맺었다.
개요 1636년 인조 14년인 병자년 12월 초에 청 태종은 직접 12만의 군사로 조선을 침략하는 병자호란을 일으킨다. 조선은 청군을 맞아 결사항전을 했지만, 전황이 불리해져 인조는 세자와 함께 남한산성에서 항전을 계속한다. 1637년 1월 초엔 청의 12만 대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했으며, 조정은 결사항전을 주장하는 척화파와 최명길 등의 화의를 하자는 주화파로 분쟁하게 된다.그 사이 청 군에 의해 강화도로 피신했던 세손과 왕자들이 모두 잡히자, 결국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삼전도로 나아가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고 항복을 한다.
청은 조선에 다음과 같은 강화조건을 제시한다.
결 과 1637년 강화조건의 결과로 소현세자와 부인강씨, 봉림대군과 부인 장씨와 김상현 등의 신하들이 청나라 선양으로 압송되었다. 1639년 인조 17년 삼전도비를 세운다. 1640년 인조 18년 청나라의 요청으로 반청론자인 임경업을 수장으로 수군 6천 명을 파견했으나, 청조의 책망을 받고 돌아오고, 임경업은 1644년 명에 투항한다. 1645년 청나라에 볼모로 억류되었던 소현세자가 귀국하나, 귀국 후 2개월 만에 석연치 않은 죽음을 당하고, 부인 강씨는 사약으로 죽었으며, 유비가 세자로 책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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