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1786-1856)
추사 김정희의 초상 2008년 우현(又玄) 송영방(宋榮邦) 선생이 기존의 초상화를 ...
추사체라는 글씨체로 우리에게 유명한 서예가이자 화가였던 김정희는 조선 말기, 부패한 정치의 희생양이었습니다. 뼈대있는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출세 가도를 달리다가, 조선을 망하게 만들었던 당파 싸움에 휘말려 거의 10여년 동안 제주도와 북청에서 귀양살이를 하다가 힘들고 기구한 일생을 마쳤지요. 하지만 김정희는 그가 그렸던 대나무처럼 꼿꼿한 삶을 살았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다고 스스로 자부하였으며, 많은 이들에게 학문의 본질과 선비의 도리를 가르쳤습니다. 그의 정신 세계는 그가 그린 그림에서도 볼 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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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한도(歲寒圖) (1844)]
이 그림은 김정희의 가장 대표적 작품이자, 조선 시대 문인화 중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이 <세한도>에 대해 평가를 하는 것 조차 불경스러운 일로
간주될 정도로 신격화,
신비화 되어 있죠. 이는 제주도 유배 중에 그의 처연한 심경을 생생하게
그려냈다고 생각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 부작란도(不作蘭圖) (1844)]
배웠을 정도입니다.
아끼며 그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서예 가운데 한국 역사상 추사체만큼 경지에 다다른 것으로
평가되는 작품도 드물다.
설문조사 결과 한국의 미술사가들은 모두 추사의 작품을
‘최고의 글씨’로 꼽았다.
그 중에서도 ‘불이선란도’는 詩·書·畵의 일체를 보여주며
초서, 예서, 행서 등
다양한 글씨체를 혼융해내는 것에서 그 탁월함을 능히 알 수 있는데,
서예전공자인 이동국 씨가 이를 중심으로 추사체의 미덕을
살펴보았다. /편집자주
고도의 理念美를 전적으로 筆劃과 墨色으로
창설한 이로 추사(1786~1856)가 꼽히며,
그의 작품 중에서도 ‘불이선란도’는 최고 완숙미를 갖춘 작품이다.
혹자는 ‘세한도’를 앞세우기도 하지만 詩·書·畵의 혼융을 三絶로 완전히 보여준 ‘불이선란도’와는 성격이 다르다.
왜냐하면 ‘불이선란도’는 추사체가 완전히 농익어 소위
碑學과 帖學의 성과가 혼융·완성되는
말년의 작품이자 서예적 추상성과 불교적 초월성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우선 작품의 구성을 보자.
‘불이선란도’는 이름 때문에 습관적으로 난초에 눈이 가게 되지만
글씨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한 뿌리의 난화를 둘러싸고 한수의 題詩와 세 종류의 跋文, 自號와 다양한 印文의 낙관이 있기 때문이다.
난을 먼저 그린 후 제발을 했는데, 순서에 유의해서 봐야 그 내용적 맥락을 제대로 알 수 있다(표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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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글씨영역에 따라 극도로 절제된 먹의 농담,
方圓의 필이 혼융되며
구사된 난의 줄기나 글씨의 획은 이미 둘이 아니라 ‘초예기자지법’ 한가지일 뿐이다.
나아가 점획의 太細나 長短 등 서로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조형요소가
그림과 글씨에 조화롭게 하나로 적용되는 데서
‘불이선란도’의 아름다움은 역설적으로 奇怪와 古拙로 다가온다.
특히 <표1>의 1열과 2열의 ‘天’·‘達’·‘俊’·‘筆’ 과 같이 각종 획이 축약되거나
‘有’·‘客’·‘蘭’·‘摩’와 같이 극도로 길게 강조되면서
이런 재미를 극대화하고 있다.
題詩의 章法을 봐도 <표2> ①-1의 첫 행에서 보듯 ‘不’와 ‘作’,
‘蘭’과 ‘花’의 大小대비나
예서와 행서·초서 등 서로 다른 서체의 운용을 통해
극단적인 변화 속에서도 조화를 이끌어내고 있다.
또한 <표1>의 3열에서 보이는 ‘放’·‘筆’·‘可’·‘有’등과 같이
급기야는 필획마저도
뭉뚱그려지고 해체되면서 그림과 글씨의 경계를 없애기까지 한다.
난의 잎 또한 50세 전후 완성된‘난맹첩’의 작품에서 보는 바와 같은
엄격한 비수와 三轉의 묘미와, 더불어 통상적인 鳳眼이나 象眼도
생략되거나 무시되면서 그저 점획으로 해체되고 있다.
[ 지란병분(芝蘭竝盆) (1844)]
“지초와 난초가 향기를 함께 하다” 는 뜻의 그림입니다.
중심부에 난초를 엷은 먹으로 그리고, 오른 쪽에 진하게 영지를 그렸는 데요,
영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이 두 가지가 추사의 정서를 보여주는 듯
조화롭게 그려져 있습니다.
왼쪽에는 대원군인 이하응과 친구 권돈인의 발문이 적혀있습니다.
[ 증 번상촌장(樊上村庄) 난 (1844)]
추사가 제주 유배시절에 친구 권돈인을 위해 그린 작품이며
번상촌장은 번리에 살던 권돈인의 별서이름이라고 하네요.
왼쪽 위의 발문은 권돈인이 붙인 것입니다.
“난초꽃과난초잎이 산중 서재에 있는데
어디에서 부는 가을바람이 사람의 애를 태우네
바람과서리에 쉽사리 꺽인다면
어찌 오래도록 산중 서재에 향기를 남기겠는가!”
(국립중앙박물관 전시) 난맹첩(蘭盟帖)중 염화취실
(국립중앙박물관 전시) 난맹첩(蘭盟帖)중 염화취실
김정희, 호고유시수단갈 / 연경루일파음시. 수식득격
[ 묵란도 (1850)]
추사를 무척 따랐던 조희룡의 작품입니다.
그는 특히 난초와 매화를 잘 그렸는데요, 추사는 그에 대해
“조희룡은 난초를 배워서 치지만,
끝내 화법이라는 한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가슴속에 문자기가 없기 때문이다.”라는
평을 합니다.
이는 화법과 기교에만 치중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나름대로 절제된 표현과 힘찬 필선은
후대인들에게 인정받고 있습니다.
추사 김정희(1786~1856). 那將月__訟冥司 나장월모송명사.
어찌하리오!
(유배지에서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다)
추사 김정희: <석파의 난권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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