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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흘러간옛노래

애원 - 황규현

 

 

                              


     

    애원 - 황규현   


    작사: 박진하, 작곡: 박진하

     

     

    목이 메어 불러보는 내 마음을 아시나요

    사랑했던 내님은 철새 따라 가버렸네

    허무한 마음으로 올리는 기도소리

    그대는 아나요 무정한 내 사랑아

    몸부림쳐 봐도 재회의 기약 없이

    가버린 그님을 소리쳐 불러본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소식이나 전해다오


    허무한 마음으로 올리는 기도소리

    그대는 아나요 무정한 내 사랑아

    몸부림쳐 봐도 재회의 기약 없이

    가버린 그님을 소리쳐 불러본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소식이나 전해다오

     

     



    황규현이란 가수이름을 기억하는 대중들은 드물다. 그러나 70년대를 걸쳐 시원한 목소리로 대중들의 가슴속을 파고들었던 히트곡 <애원>의 노랫말 "목이메여 불러보는 내마음을 아시나요. 사랑했던 내님은 철새따라 가버렸네..."의 애절한 멜로디는 타임머신인양 까맣게 잊어버린 옛추억을 되살려놓는다.

    미8군 출신으로 60년대 록그룹 ‘포가이스’, ‘플레이보이’, ‘쉐그린’의 리더 겸 보컬로 절정의 인기를 누렸던 황규현.

    60-70년대초는 외국곡을 얼마나 똑같이 연주하고 노래하는가를 놓고 록그룹의 우열을 가렸던 한국록의 암흑시기였다.

    최초로 창작곡을 발표했던 록의 대부 신중현마저도 이 당시엔 무시당하는 일이 허다했을 만큼 외국곡을 연주해야 대접받던 잘못된 사대주의 풍토가 만연했다. 황규현도 예외는 아니었다. 폼나는 외국곡이 아닌 소울풍의 가요 <애원>을 불러보라는 음악친구 박진하의 간청이 영 못마땅했다.

    "당시 폼잡고 불렀던 외국곡에만 열광했던 팬들조차도 마지못해 불렀던 <애원>만을 기억할 뿐입니다. 창작곡의 개념이 없던 당시의 음악적 공허함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30여년이 지난 요즘 황규현이 회한에 젖어 하는 말이다.

    황규현은 1947년 3월 20일 서울 약수동에서 유복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4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새어머니를 맞아 2남2녀의 이복동생을 두었다. 친모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지낸 장충초등학교시절의 유일한 취미는 야구였다.

    휘문중학에 들어가,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밴드부에 들어가 색소폰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 음악과의 인연이다. 당시 함께 했던 밴드부원 안건마는 70년대를 풍미했던 편곡자로 유명하다. 놀기 위해 음악을 시작했지만 낫킹콜, 패티 페이지, 벨라폰테의 노래들은 가정사로 어두워진 어린 마음을 위로하는 좋은 친구가 되었다.

    63년 당시는 한명숙, 현미, 최희준 등 미8군 출신의 허스키 보컬가수들이 인기를 구가하던 시기였다. 휘문고 1학년 황규현은 음악수업시간에 팝송 을 불러 선생님으로부터 '쉰목소리가 매력적이다. 가수가 되보라'는 칭찬을 듣자 어깨가 으쓱해졌다.

    국민학교 동창인 차중락의 동생 차중용은 둘도 없는 친구. 우연히 친구집에 놀러갔다가 안방에서 미8군 오디션연습에 몰두하고 있는 김홍탁, 윤항기, 차도균, 차중락 등 그룹 키보이스 멤버들의 연주를 듣고 정신이 혼미했다.

    매일같이 찾아가 구경을 하는 황규현에게 키보이스 멤버들은 장난삼아 노래를 시켰다. <모나리자> <투영> 등 팝송들을 소울스타일로 멋들어지게 부르는 황규현의 노래를 듣고 김홍탁 등 멤버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후 문래동 728헌병대의 미군클럽공연은 물론 뒤세네, 세시봉의 일반무대공연에도 함께 다닐 수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65년 겨울 키보이스의 매니저 송재일은 동두천 미군무대에 줄을 대주었다.

    빡빡머리를 한 채로 비틀즈밴드(당시 연주만하는 밴드가 아니고 보컬이 있는 밴드는 모두 이렇게 부름)라는 4인조 캄보밴드를 결성, 보컬을 맡으며 본격적인 음악생활을 시작했다.

    제법실력을 다진 67년쯤엔 이태원 세븐클럽에 진출, 록그룹 ‘FOUR GUYS’의 리더 한웅이 ‘HE5’를 창립하며 팀을 떠나자 2기 ‘포 가이스’를 결성했다. 새롭게 결성한 2기는 보컬 겸 리듬기타 황규현, 기타 이승재, 베이스 조경수, 드럼 우승만의 제법 쟁쟁한 라인업이었다.

    기타 이승재는 후에 솔로로 독립 공전의 히트곡인 <눈동자>를 발표했고 베이스 조경수는 <아니야> 등으로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황규현은 "당시 포 가이스의 미8군 오디션등급은 B클라스였다. 실력은 A클라스급이었지만 개런티가 높아지면 공연부킹이 어려워져 의도적으로 B클라스를 유지했고 실제로 이런 그룹들이 꽤 많았다. 당시 미8군소속 그룹들은 미군들이 좋아하는 음악만을 선곡하여 연주했기에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음악을 할수가 없었다"고 회고한다.

    68년 UN클럽으로 주무대를 옮기며 5인조 록그룹를 결성했다. 라인업은 보컬 황규현, 기타 정명용, 베이스 김종구, 리듬기타 이승종, 드럼 김철회였다. 하나같이 훤칠한 외모에 신장이 170cm이상인 미남들로만 구성된 플레이보이는 명동 미도파살롱에서 키보이스를 능가하는 인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인기만을 우선해 외모에만 신경쓰다보니 음악성이 떨어져 68년말 탈퇴를 했다'고 고백한다. 처음으로 음악적 갈증을 느끼며 결성한 5인조 록그룹 <쉐그린>.

    1기 쉐그린의 라인업은 보컬 황규현, 기타 정명용, 리듬기타 이태원, 베이스 전언수, 드럼 김철회였다. 전언수는 미8군 컨츄리쇼 베이스 주자였고 이태원은 아마추어 대학생가수로 이름을 날리던 중 ‘쉐그린’ 멤버로 영입되며 대학까지 도중하차했다.

    이태원의 소개로 교체된 미8군밴드 기타리스트 조동진의 등장은 주목할 만하다. 80년대 독특한 음악세계를 구축하며 본격적인 언더가수장르를 연 조동진이 포크가 아닌 록 기타리스트로 60년대말 음악생활을 시작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록그룹 쉐그린의 리더 황규현에겐 필생의 히트곡 <애원>을 탄생시키기 위해 트로트가수 겸 작곡가 박진하, 히트곡제조기 킹레코드 박성배 사장과의 운명적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쪽 날개를 접고 살아야했던 '참 음악인'

    1969년 여름 <애원>의 작곡가 박진하는 그룹 ‘쉐그린’의 리드보컬 황규현이 애절하게 토해내는 허스키한 목소리에 반하며 친구가 되기를 청했다.

    낮에는 레코드가게 점원으로 일하고 밤에는 트로트가수로 음악생활을 하던 그는 황규현을 위해 당시로서는 드문 스탠더드팝계열의 창작가요<애원>을 작곡했다. "생명력있는 가수가 되려면 외국곡이 아닌 가요를 불러야 된다"며 악보를 건내 보았다.

    "폼나는 외국곡도 아닌 촌스런 가요를 왜 불르냐"며 황규현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계속된 간청에 그룹 쉐그린과 함께 미도파 살롱무대에서 "새로 취입한 곡인데 한번 평가해 달라"며 시험삼아 불러보았다.

    비트 강한 하드록과 외국의 소울노래를 기대하고 왔던 팬들은 다소 의아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며칠 후 <애원>을 신청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 당시 그룹 쉐그린은 미도파살롱과 우미회관, 에드훠의 보컬출신 서정길이 운영했던 관철동의 라틴쿼터 등 여러 무대를 겹치기로 뛸 만큼 인기록그룹.

    출연하는 무대마다 <애원>을 요구하는 팬들이 급속히 늘어갔다. 길거리에서도 알아보는 사람들로부터 인사를 받느라 분주할 만큼 <애원>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라틴쿼터에서 공연준비를 하던 69년 가을 어느날, 킹박이라는 사람이 찾아와 대뜸 "애원 한번 불러보라"며 다그쳤다. 음반취입경험이 없는 황규현은 히트곡 제조기로 명성이 드높던 킹레코드의 박성배사장을 알아보지 못했다.

    서정길은 "돈 하나 안 들여도 판을 내줘 히트시키는 유명한 사람"이라고 귀뜸했다. 가슴을 파고드는 촉촉한 노래를 들은 킹박은 숨쉴 틈도 주지 않고 "음반을 내자"고 재촉했다. 무일푼으로 집을 뛰쳐나와 노래를 부르며 근근이 생활하던 황규현은 30만원이라는 거액의 음반제작비가 있을 리 만무.

    '제작비는 걱정 말라'는 제안에 녹음에 들어갔지만 이재에 밝았던 킹박은 성음제작소에 위탁제작을 맡기더니 결국 대지레코드 정사장에게 판권을 넘겼버렸다. 음반번호가 DG인 것은 이때문.

    솔로데뷔를 꿈꾸며 마장동 스튜디오에 드나들며 '당시 가수들이 많이 드나들던 청계다방에서 음반을 내달라며 구석에서 기다리고 있던 무명의 김추자와 한민, 은희의 라나에로스포도 알게 되었다'고 추억에 잠긴다.

    황규현의 솔로독립으로 그룹 쉐그린은 해체의 수순을 밟았다. 멤버였던 이태원, 전언수는 다시 합칠 가능성을 두기 위해 <쉐그린>의 이름으로 포크듀오를 결성했다. 포크듀오 ‘쉐그린’은 <동물농장>, <얼간이짝사랑> 등 코믹포크송을 개척, 젊은층에 크게 어필하였다.

    총12곡의 수록곡 중 박진하 작곡의 <애원>, <그대가 떠난 후>, <바람의 거리>와 서정길 작곡의 <빗소리> 등 4곡을 부르며 발매한 데뷔앨범 [애원] (성음,DG-가12,70년1월)의 반응은 뜨거웠다.

    순식간에 8만 장이 팔려나가고 재판까지 발매됐다. 데뷔앨범은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1곡을 제외하곤 모두 창작곡들로 구성되어 더욱 주목 받았다. 예상치 못한 빅히트에 대지레코드 정사장은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우미회관 연예부장 엄진과 이길봉이 작곡한 3곡을 추가해 10곡이 수록된 2집 [누구일까?] (성음,DG가33,71년5월)도 연이어 발표했다.

    일간스포츠가 창간되면서 크게 소개가 되고 TV, 라디오 방송출연요청도 들어왔다. 종로, 명동 등 음악다방에는 <애원>음반이 필수소장품일 만큼 신청이 밀려들었다.

    황규현은 '스스로 음반을 냈다고 생각하니 너무도 감격에 겨워 하룻밤내내 눈물을 흘렸다'고 당시의 심정을 전해준다.

    <애원>은 80년대 중고등학생들 사이에까지 '목이메여 불러본다 지금은 연습이야'로 개사되어 불리어질 만큼 10여년이상 끊임없이 불리어진 공전의 히트곡. 일순간 찾아든 인기의 전율은 짜릿했지만 지속적인 인기유지를 위해선 돈이 필요했다.

    독집음반을 들고 아버지를 찾아가 "30만원만 있으면 나훈아를 능가하겠다"고 설득했지만 보수적인 부친은 "군에나 가라"며 냉담했다. '좌절감에 온통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리고 나왔다'는 황규현.

    "당시도 홍보비 없이는 인기유지가 불가능했다"며 가수들의 치유되지 않는 뿌리깊은 상처를 조심스레 이야기한다. 인기의 열풍 속에 단맛과 쓴맛을 모두 맛봤다. 73년 2기 5인조 ‘플레이보이’를 결성, 유명고고클럽인 닐바나에서 그룹활동을 재개했다.

    이후 조선호텔 투머로 나이트클럽, 국제호텔, 라이온스 등에서 생계를 위한 소모적 음악활동으로 일관했다.

    그 뒤 황규현과 VIP'S를 결성, 13년만인 84년에 3집 [황규현과 수레바퀴] (오아시스,OL2579,84년3월) 음반을 발표했다.

    이때는 외국이름으로 음반을 발표할 수 없어 윤회사상에 입각해 황규현과 수레바퀴로 그룹명을 변경했다. 불음곡 석가모니를 타이틀곡으로 발표한 11곡 중 <거기 아무도 없소>가 히트를 했지만 본인은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음반이다.

    주간중앙 서병후 기자의 도움으로 86년엔 4집을 89년엔 민영후란 예명으로 5집 를 발표하며 <애원>의 영광을 재현하려 하였지만 늘 넉넉치 못한 재정으로 좌절해야만 했다.

    '40대 이상이 공감할 수 있는 트로트록을 꼭 해보고 싶다'며 식지 않는 음악적 열정을 숨기지 않는다. 뒤늦게 삶의 체험이 녹아든 편안한 창작음악에 대한 갈증에 목이타는 황규현의 모습은 음악적 탐구보다는 인기만을 ?i아 단명하는 요즘 후배가수들에게 너무도 많은 것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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