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대로 400년 동안 거부장자로 이어온 최부잣집 *◆
*12대 최부잣집 가문의 계보*
1대. 최진립(1568~1636) 경주최씨 시조인 최치원의 17세손. 임진왜란때 의병을 모아 크게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다시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대왕은 남한산성에 피신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공주영장이었던 최진립은 충청감사 정세규의 만류에도 출정을 서두른다. "대왕께서 포위당하고 계신데 늙은 신하가 살기를 도모하겠는가" 예순 아홉의 최진립은 임금이 계신 남한산성을 향해 군사를 몰아갔다. 모든 장수들이 퇴각했지만 최진립은 끝까지 항전을 결심한다. 그리하여 1636년 12월 27일, 정무공 최진립은 장렬히 순국했다. 2대. 최동량(1588~1664) 새로운 농법을 개발하고 식산을 장려하여 크게 부의 터전을 일구었다. 3대. 최국선(1616~1657) 비로소 만석꾼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또한 왕실의 제례주를 사가에서 처음 빚었으니 오늘날의 경주법주가 되었다. 크게 재산을 늘려 만석의 토대를 일구었으나, 명화적이란 거대한 도적떼로부터 충격적인 위협을 당하고 나서 최부잣집의 노선은 대전환의 계기를 마련한다. 부의 축적은 비록 합법적인 방법일지라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가진 자와 못가진 자가 서로 힘을 모아 함께 살아가는 길을 택하기로 한다. 마침 삼남지방에 흉년이 들어 무수한 사람들이 굶어죽어 가고 있었다. 최국선은 과감히 곳간을 풀어헤친다.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다짐한다. 굶주린 이에게는 밥과 식량을, 헐벗은 이에게는 옷과 옷감을 건네주며...... 그러면서 그때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을 세우게 된다. 4대. 최의기(1653~1722) 드디어 만석의 재산을 이뤄냈다. 5대, 최승렬 6대. 최종률 7대. 최언경 8대. 최기영(1768~1834) 지금까지의 내남면 이조리에 머물렀던 최부자의 종가를 당시의 교촌(지금 경주시 교동의 요석궁터)으로 이주한다. 9대. 최세린 10대. 최만희 11대. 최현식 12대. 최 준(1884~1970) 느닷없는 한일합방(1910년)으로 나라를 잃게 된다. 최현식은 당시 20대인 최준에게 살림을 넘긴 후, 출입을 끊고 매일 아침 북쪽을 향해 곡을 했다. 최준 또한 망국의 한을 삼키고만 있기는 혈기왕성한 나이였다. '조선국권회복단'에 경주군 대표로 활동하며 자금을 대다가 투옥되기도 한다. 다시 백산 안희제를 만나 백산상회를 통해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해 오다가, 드디어 1945년, 꿈에도 그러던 광복을 맞이했다. 400년을 이어온 부를 이제 영원히 보존할 길을 찾아 고심하던 끝에 육영사업에 전 재산을 내놓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최준은 만석지기 토지와 살고 있던 집까지 모조리 학교재단으로 희사한다. 당시는 대구대학이었으나 숱한 우여곡절을 거쳐 지금의 영남대학교로 성장한 것이다. 해방이 되었으니 일경의 감시도 없고 전 재산을 희사했으니 도둑 들 일도 없어서 이제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살겠다는 말을 남긴 채 최준은 1970년 10월, 마지막 최부자의 막을 내리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희사--댓가를 바라지 않고 기꺼히 내놓는다는 뜻인데 나라와 겨레의 장래를 위해 전 재산은 물론 살림집까지 내놓은 그 고귀한 뜻이랑, 만석꾼보다 독립유공자 자손으로 받는 25만원의 연금이 더 자랑스럽다는 후손들.....
이제 최부잣집은 우리들 기억 속에 고이 간직되었다가 다시 제2, 제3의 최부자로 나와 서로서로 이익을 도와 우리 함께 복을 누리는 그런 세상이 오기를 학수고대 기다려 보아야겠다.
마지막 최부자 최준(오른쪽)과 그의 동생 최윤
|
'♠ 감동적인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느 며느리의 저금통장 (0) | 2012.11.17 |
---|---|
★ 어느 여판사의 감동적인 이야기★ (0) | 2012.09.26 |
어머니 얼마나 추우셨어요. (0) | 2012.09.17 |
★ 두 수녀의 감동적인 이야기 ★ (0) | 2012.09.17 |
★모정의 세월...(실 화)★ (0) | 2012.09.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