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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동적인글

* 12대로 400년 동안 거부장자로 이어온 최부잣집 *|◆

 

* 12대로 400년 동안 거부장자로 이어온 최부잣집 *|

 

 

 

 

 

 

   * 12대로 400년 동안 거부장자로 이어온 최부잣집 *

 

  예로부터 부자가 3대를 내려가지 못한다는 속담이 있다.

  1대는 돈을 벌고, 2대는 집을 짓고, 3대는 집을 팔아서,

  4대째는 거지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경주의 최부잣집은

  12대를 거쳐 만석꾼 부자로 400년을 이어왔으니,

  나라 안에서 최장수의 부자일 뿐 아니라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 세계에서 가장 오랜 세습으로 이어온 부자가

  이태리의 '메디치' 가문(202년-1449~1651)이라고 하지만,

  우리나라 최부잣집이 그보다 갑절이나 더 긴

  사실상의 세계 최장수 부자 가문인 셈이다.  

 

  경주 최부잣집(崔富者家)의 내력은 제1대인 최진립(신라의 대석학

  최치원의 17세손)으로부터 12대인 최준(1568~1970)까지의

  402년 동안이나 거부장자의 명문가로 이어져 왔을 뿐 아니라,

  만석꾼의 재산을 이 나라와 겨레를 위해 고스란히 내놓은 것으로

  온 겨레의 삶 속에 길이길이 명문가의 표상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경주 최부잣집의 특별한 가훈

 

  몸을 닦는 육연(六然)과 집안을 다스리는 육훈(六訓)으로

  

  1. 自處超然 스스로는 초연하고

  2. 對人柔然 남에게는 온유하며

  3. 無事澄然 일이 없으면 고요히 머물고

  4. 有事敢然 일이 있을 때면 과감히 대처하며

  5. 得意淡然 뜻을 얻었을 때는 담담하고

  6. 失意泰然 뜻을 잃었을 때는 태연하라 

 

  요즘은 이렇게 몸과 마음을 닦아 인품을 기르는 덕목이 사라져 버린 세상이 되고 있으니, 

  그러한 수신 제가(修身齊家)가 치국 평천하(治國平天下)의 기본인 줄을 어떻게 알겠는가. 

  우리 교육이 단순히 생존의 수단방법을 배워가기만 하고 온화한 가슴을 길러내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저 많이 배워 많이 알고 많이 모아 많이 가지는 것을 교육의 전부로

  인생의 목표로 정신없이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돼지처럼 살아가는 실리만 챙길 줄 알고

  학처럼 여유로운 품격을 누려 가지는 못하는 것이다. 한 끼니 밥을 먹고 적어도 네다섯

  시간쯤 비워두는 동안 소화흡수되어 피가 되고 살이 되고 에너지화 되어 건강할 수 있듯 

  이,배운 지식이 감성화 되고 지혜화 될 시간적인 여유를 두어야 인간적인 성숙이 이뤄지게

  되는 법이고, 또한 자아 완성의 경지로 이어질 수가 있는 것이다. 곧 악인에서 선인으로,

  어리석음에서 지혜로움으로, 현인으로 성인으로 성장해 가야 한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 성숙의 단계만큼 인간적인 불행과 속박에서 벗어나게도 되는 법이기 때문

  이다. 이것이 진정 사람을 살리는 길이 되겠지만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하루하루를 죽음

  을 향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그 죽음 앞에서는 우리 모두가 손을 들어야

  할 테니까 말이다.

  인간을 살려내지 못하는 지식경제 성장과 과학문명의 발달은 어디에다 써먹을 것이며,

  결국 누굴 위해 종을 울리는 거란 말인가. 반드시 인간을 살려내야 하고, 다시 그 본래

  인간의 자리로 되돌리는 데 이처럼 몸과 마음을 닦는 자세가 삶의 기본바탕이 돼있어야

  할 것이다.

 

  1,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라   1대 최진립

 

  최부잣집은 12대 중, 9대의 만석에다 9대의 진사가 나온 셈이다.  

  진사는 초시의 합격 관문인데, 이를테면 양반의 신분만 얻고

  벼슬길로는 오르지 않는다는 것이 집안의 철칙으로 내려온 셈이다.

  말 타면 종 부리고 싶다는 속담이 있듯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돈이 있으면 권력도 잡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이 집안에서는, 벼슬이 높아질수록 당쟁에 휘말릴 확률도 높고

  감옥이 가깝다는 사실을 통찰하고서, 경제력 하나만으로 수신제가하여

  국가사회에 이바지하는 것으로 사람의 도리를 다하겠다는 포부인 듯하다. 

 

 2. 재산은 석 이상을 모으지 말라   4대 최의기

 

  두번째 철학은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신념이 철저했다.

  돈이라는 것은 가속성을 지니고 있어서 어느 시점을 지나면 돈이 돈을 벌게 된다.

  멈추기가 매우 어려우나 최부잣집은 만석에서 과감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던 거다.

  그 환원은 소작료 할인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웃으로 국가로 확산되어 나갔던 것이다. 

  대체로 당시의 소작료가 수확량의 70% 정도였는데, 최부잣집은 50% 이하로 끌어내렸다.

  소작료가 저렴하니까 소작인들이 앞을 다투어 최부잣집 농사를 지으려고 줄을 섰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팠지만 최부자가 논을 사는 데는 박수를 쳤던 것이다.

  최부자가 논을 사면 자기들도 상생의 이치로 먹고 살기가 나아졌기 때문이다.

 

 

  3, 과객은 귀천을 구분하지 말고 후하게 대접하라    4대  최의기

 

  과객들이 묵고 가는 사랑채에는 독특한 쌀뒤주가 있었다.

  두손이 겨우 들어가도록 입구를 좁게 만든 뒤주였는데,

  누구든지 두 손을 넣어서 쌀을 가져갈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다음 목적지까지 갈 때 소요되는 여행경비로 사용하라는 뜻이었다.

  입구를 좁게 한 이유는 지나치게 많은 양은 가져가지 말라는 표시였다.

  정보매체가 없던 그때는과객들이 정보 전달자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과객들을 통해 최부잣집의 높은 덕망이 전국으로 퍼져 나갔던 것이다.  


  4, 흉년에는 땅을 사지 말고 파장 때는 물건을 사지 말라     3대  최국선

 

  흉년이 드는 해면 수 천명씩 굶어 죽어가는 때였다.

  흉년은 없는 이들에게는 지옥이었지만 있는 이에게는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작용됐다.

  가난한 사람들이 당장 굶어죽지 않기 위해

  헐값으로 내놓은 전답을 매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죽빼미논’까지 등장하기도 했는데,

  죽 한 그릇을 얻어먹고 논 한 마지기를 내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부잣집은 이런 짓이라곤 꿈에도 하지 않았다.

  이것은 실로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한 대개의 다른 부자들은 파장 때 떠리미 물건을 사들였는데, 

  최부잣집은 절대 그러지 않았다. 언제나 일찍 제값을 주고 샀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제일 좋은 물건을 먼저 최부잣집으로 가져 왔다.

  최부잣집과 이웃들 사이에는 그만큼 신뢰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5, 가문에 시집온 며느리들은  3년동안 무명옷을 입도록 하라    6대 최종률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동안 무명옷을 입어야 하는 원칙을 지켜왔다.

  조선시대는 창고 열쇠를 안방마님이 가지고 있었던 시대였다.

  부잣집 자부들의 근검절약과 이웃에 대한 배려가 매우 철저했던 것이다.

  보릿고개 때 새댁들은 쌀밥을 먹지 않고, 은수저도 사용하지 않았다.

  백동 숟가락의 태극 무늬 부분에만 은을 박아 썼던 것이다.

  그녀들은 만석꾼 부잣집 며누리이자 양반집의 규수들이었지만,

  검소하게 옷을 누덕누덕 기워입고 하수인들과 함께 부엌일을 했다. 

  시키기만 하는 게 아니라 함께 일을 했던 주인들의 자세로 익어졌다.

  소작인들과 우애있게 지내는 것이 몸에 배어 한집안처럼 살았던 것이다.

 '가진 자로서 사회에 대한 떳떳한 도덕적 책무'를 이행했던 거다.  

 

  6,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3대  최국선

 

  최부잣집의 사랑채는 한꺼번에 백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그래도 방사가 모자랄 때면 주위의 소작인들 집으로 식량과 반찬을 보내어

  숙식을 제공해 주도록 하고, 대신 소작료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것이 마치 우애로운 한 집안 같아서 참 훈훈하게 느껴진다.

  최부잣집의 한 해  식량의 소비량이 대략 3000석이었는데, 

  1000석은 식구들 양식으로, 1000석은 과객들의 접대로,

  나머지 천석은 100리 안 이웃들을 돌봐줄 몫이었다. 

  사방 100리를 잡아보면, 동으로는 경주 동해안 일대로부터

  서쪽으로 영천까지고, 남쪽은 울산에서 북으로 포항까지 이르게 된다.

  '최부잣집' 하면 온 나라 안에 소문이 나 있었기 때문에

  항시 과과객들이 잔칫집처럼 모여 들었다고 한다.

 

  *12대 최부잣집 가문의 계보*

 

  1대. 최진립(1568~1636) 경주최씨 시조인 최치원의 17세손.

                  임진왜란때 의병을 모아 크게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다시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대왕은 남한산성에 피신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공주영장이었던 최진립은 충청감사 정세규의 만류에도 출정을 서두른다.

                  "대왕께서 포위당하고 계신데 늙은 신하가 살기를 도모하겠는가"

                  예순 아홉의 최진립은 임금이 계신 남한산성을 향해 군사를 몰아갔다.

                  모든 장수들이 퇴각했지만 최진립은 끝까지 항전을 결심한다.

                  그리하여 1636년 12월 27일, 정무공 최진립은 장렬히 순국했다.

  2대. 최동량(1588~1664) 새로운 농법을 개발하고 식산을 장려하여 크게 부의 터전을 일구었다.

  3대. 최국선(1616~1657) 비로소 만석꾼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또한 왕실의 제례주를 사가에서 처음 빚었으니 오늘날의 경주법주가 되었다.

                  크게 재산을 늘려 만석의 토대를 일구었으나, 명화적이란 거대한 도적떼로부터

                  충격적인 위협을 당하고 나서 최부잣집의 노선은 대전환의 계기를 마련한다.

                  부의 축적은 비록 합법적인 방법일지라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가진 자와 못가진 자가 서로 힘을 모아 함께 살아가는 길을 택하기로 한다.

                  마침 삼남지방에 흉년이 들어 무수한 사람들이 굶어죽어 가고 있었다. 

                  최국선은 과감히 곳간을 풀어헤친다.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다짐한다. 

                  굶주린 이에게는 밥과 식량을, 헐벗은 이에게는 옷과 옷감을 건네주며......  

                  그러면서 그때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을 세우게 된다.

  4대. 최의기(1653~1722) 드디어 만석의 재산을 이뤄냈다.

  5대, 최승렬

  6대. 최종률

  7대. 최언경

  8대. 최기영(1768~1834) 지금까지의 내남면 이조리에 머물렀던 최부자의 종가를

                  당시의 교촌(지금 경주시 교동의 요석궁터)으로 이주한다.

  9대. 최세린

  10대. 최만희

  11대. 최현식

  12대. 최 준(1884~1970) 느닷없는 한일합방(1910년)으로 나라를 잃게 된다.

                 최현식은 당시 20대인 최준에게 살림을 넘긴 후, 출입을 끊고 매일 아침

                북쪽을 향해 곡을 했다. 최준 또한 망국의 한을 삼키고만 있기는 혈기왕성한 나이였다.

                 '조선국권회복단'에 경주군 대표로 활동하며 자금을 대다가 투옥되기도 한다.

                 다시 백산 안희제를 만나 백산상회를 통해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해 오다가,

                 드디어 1945년, 꿈에도 그러던 광복을 맞이했다. 400년을 이어온 부를 이제

                 영원히 보존할 길을 찾아 고심하던 끝에 육영사업에 전 재산을 내놓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최준은 만석지기 토지와 살고 있던 집까지 모조리 학교재단으로 희사한다.

                 당시는 대구대학이었으나 숱한 우여곡절을 거쳐 지금의 영남대학교로 성장한 것이다.

                  해방이 되었으니 일경의 감시도 없고

                  전 재산을 희사했으니 도둑 들 일도 없어서

                  이제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살겠다는 말을 남긴 채

                  최준은 1970년 10월, 마지막 최부자의 막을 내리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희사--댓가를 바라지 않고 기꺼히 내놓는다는 뜻인데

                  나라와 겨레의 장래를 위해 전 재산은 물론 살림집까지 내놓은 그 고귀한 뜻이랑,

                  만석꾼보다 독립유공자 자손으로 받는 25만원의 연금이 더 자랑스럽다는 후손들.....

 

                  이제 최부잣집은 우리들 기억 속에 고이 간직되었다가

                  다시 제2, 제3의 최부자로 나와 서로서로 이익을 도와

                  우리 함께 복을 누리는 그런 세상이 오기를 학수고대 기다려 보아야겠다.

 

        

                 

 

                             마지막 최부자 최준(오른쪽)과 그의 동생 최윤

 

         마지막 최부자 최준은 어느 노스님의 금언을 일평생 지니고 실천하신 분이셨다.


           재물은 마치 똥오줌(糞尿)과 같아서 
           한곳에 모아두면 악취가 나 견딜 수가 없지만 
           골고루 사방에 흩뿌리면 만백성이 풍요를 누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