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모의 굳은 지조
김삿갓은 제천→원주→한양을 거쳐 서도로 2차 방랑의 행보를 잡았다. 기온
이 더 없이 적당하여 발걸음은 가벼웠으나 온 산천이 붉게 타오르며 눈길을 붙
잡는 바람에 행보는 한여름 엿가락처럼 축축 늘어졌다. 해거름에 원주로 넘어
가는 고개 아래 당도하니 마침 객점이 하나 나타났다.
“주모. 지나가는 과객인데 수중 무일푼이니 잠이나 좀 재워주게.”
“돈이 없다고 찾아든 손님을 굶겨 재울 수는 없지요. 건넌방으로 드시우.”
주모가 들고 온 저녁상에는 술까지 한 병 올라 있었다.
“이 세상 주모들이 모두 자네 같으면 살맛이 나겠네그려.”
김삿갓은 기대하지도 않았던 막걸리가 목을 타고 넘어가자 각중에 시흥(詩興)
이 도도하여 율곡의 「추사(秋思)」라는 시를 읊었다. 너무 길어 시는 생략한다.
“참 계절에 잘 어울리는 시로군요.”
“자네가 시를 어떻게 아시는가?”
“원래는 우리 집도 양반가문이었는데, 윗대에서 뭐가 잘못되어 신세가 이리
고단하게 되었답니다. 다행히 어릴 때 동네 훈장님의 배려로 사서삼경까지 공
부를 하고 시도 좀 배웠지요.”
“어허, 사서삼경까지 공부를 했다니 대단하시네그려.”
자세히 보니 자신과 동년배쯤 되는 듯한데, 고운 자태가 함흥에서 반년 간
동거했던 소연과 흡사하여 가슴이 저릿해졌다.
식사를 마친 뒤 자리에 누웠으나 휘영청 밝은 달이 가슴을 뒤흔들어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주모는 남편과 사별한 지 5년으로, 하나뿐인 아들은 읍내에
있는 외가에서 서당에 다닌다 했다. 5년이나 굶었으면 넌지시 추파라도 던질
법하련만, 여인의 몸가짐은 추호의 빈틈도 보이질 않았다. 김삿갓은 등잔을 밝
혀 시를 써내려갔다.
(앞 4연 생략)
昭君玉骨胡地土 왕소군의 고운 뼈는 호지의 흙이 되고
貴姬花容馬嵬塵 양귀비의 고운 자태도 말발굽 아래 먼지였잖은가.
世間物理皆如此 세상 이치가 모두 이러하거늘
莫惜今宵解汝身 오늘 밤 옷 벗기를 아까워하지 마시게.
‘한번 줘~잉’ 하는 노골적인 유혹이었다. 마침 안방에도 불이 켜져 있었다.
김삿갓은 헛기침을 한 뒤 문을 열고 시를 툭 던져 넣고 마당을 서성이다가, 다
읽기를 기다려 다시 헛기침을 한 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객점에 들었으면 곱게 주무시고 떠날 일이지, 어찌 이리 홀로 사는 아녀자
의 마음을 흔들어놓으십니까?”
“마음이 흔들리면 그대로 하면 돼지 홀로 사는 처지에 무에 걱정인가?”
“이 몸 아직 상중이라 몸을 열 수가 없거든요.”
“남편 죽은 지 5년이나 지났다면서 아직 상중이라니, 그게 무슨 소린가?”
주모는 사연을 털어놨다. 남편이 죽자 주모는 풍수쟁이에게 큰돈을 주고 명
당을 잡아 장례를 치렀다. 외아들이 잘되게 해달라는 기원(祈願)이었다. 그런
데 이웃마을 황 진사가 명당이라는 소문을 듣고 남편의 묘 바로 앞에 덜컥 지
애비 묘를 써버렸다. 명당을 차지하고 있는 묘 앞에 다른 묘를 쓰면 명당의 정
기가 그 묘로 옮겨가는 것이다. 주모는 여러 차례 관가에 고발하여 이장명령을
받아냈으나 황 진사는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더욱이 신임 군수는 황 진사와
죽마고우라 아예 송사 자체를 미적거리고 있었다.
“그러니 선비님께서 소장(訴狀)을 잘 좀 써주셔요. 수절과부 후리는 솜씨를
보니 군수의 마음도 능히 움직이겠소이다.”
“그 일만 해결되면 한 번 주겠는가?”
“여부가 있겠습니까.”
김삿갓은 간단명료하게 다음과 같이 고소장을 써주었다.
掘去堀去 彼隻之恒言 파간다 파간다 하는 것은 저쪽이 늘 하는 말이오,
捉來捉來 本守之例題 잡아온다 잡아온다 하는 것은 군수가 늘 하는 말일세.
今日明日 乾坤不老月長在 오늘내일 하는 동안 천지는 안 늙어도 세월은 자꾸 가고
此?彼? 寂莫江山今百年 이 핑계 저 핑계 대는 동안 적막강산은 백년은 가리로다.
“실례지만 혹시 김삿갓 선생님이 아니신지요?”
여인은 몸을 고쳐 앉으며 정색을 하고 물었다.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았는가?”
“조금 전에 주신 유혹의 시를 보고 어렴풋이 짐작했지만, 제 부탁을 받자마
자 바로 이렇게 사리를 반듯하게 짚어내실 분은 조선에 삿갓선생님밖에 더 있
습니까?”
“미안허이 주모. 내 미리 신분을 밝히지 않은 것은 습관이 돼서 그런 것이
지 속일 뜻은 없었네. 그나저나 남편에 대한 추모가 애틋하니 일이 잘 해결되
기를 바라네.”
주모는 새벽같이 일어나 동헌으로 달려갔다. 왕복 백리 길이었다. 주모는 초
저녁이 돼서야 돌아왔다.
“일은 잘 처결되었는가?”
“예. 5일 안으로 이장을 시키겠다고 약조를 했습니다. 모두가 삿갓선생님
덕분입니다.”
“자네 추모가 애틋하여 산소의 음덕이 나타난 것이지 내 덕분이랄 게 뭐 있
겠나.”
주모는 오는 길에 미국산 쇠고기까지 사다가 거하게 술상을 내왔다. 하필 미
국산 쇠고기를 사온 것은 없는 광우병을 핑계로 재협상을 요구하며 거리로 뛰
쳐나온 소위 ‘정의ㄱㅎㅅㅈㄷ’이라는 ...
나오려면 일찍이나 나오든지, 하필 촛불ㅍㄷ들이 수세에 몰리자
광란을 부추겨 국가를 혼란에 빠뜨리려는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참여한 것이니 이들이 말하는 ‘정의’는 바로 대한민국의 '전복'아니겠
는가.
“군수가 소장(訴狀)을 다 읽고 나더니 깜짝 놀라 누가 쓴 것이냐고 묻습디
다. 삿갓선생님이 먼 친척 되시는데, 제 딱한 처지를 듣더니 노발대발하시며
소장을 써주시더라고 했더니 그 자리에서 바로 황 진사에게 형리를 보내더이다.”
“예끼 이 사람아! 먼 친척이 된다면 한번 주겠다던 약조를 이행할 수 없지
아니한가?”
“삿갓선생님. 그 약조는 이부자리를 펴는 것으로 대신하면 아니 되겠습니까?”
지조 높은 선비들이 간혹 연인인 기녀와 이부자리만 펴놓고 살은 섞지 않는
고결한 사랑 방정식이 있었다. 김삿갓은 자신을 흠모하되 정절을 지키려는 주모
의 절개가 참으로 어여뻤다. 굳이 우기면 속곳을 열기는 하겠으나 구차했다.
“그리 하세나. 자네의 귀한 뜻이 참으로 가상하이.”
“선생님의 크신 도량에 감사드립니다.”
주모는 장롱에서 원앙금침을 꺼내 주안상 옆에 조심조심 펼쳐놓았다. 이어
벽장에서 촛대와 황초 두 쌍을 꺼내더니 술상 양 옆에 켜 놨다. 살 꽂이만 못했
지 영락없는 신방이었다. 술맛은 지금까지 마신 술맛을 다 합친 것보다 좋았고,
밤을 새워 술을 따라주는 주모의 자태는 함흥 명기 소연보다 고왔다.
꿈에 그리던 고향,천동마을 |
김삿갓이 살던 천동마을은 곡산읍에서도 산속으로 60여리를 더 들어간 첩첩
산중에 있었다. 험준한 산길은 가도가도 끝이 없었지만 힘들다는 생각은 추호
도 없이 가슴이 설레기만 했다. 어릴 때 동무들의 얼굴이 하나씩 떠올랐다. 동
무들과 어울려 왕복 120리도 넘는 산길을 걸어 읍내 장거리에 다녀오던 기억도
선명했다. 천동마을을 지척에 둔 계곡으로 접어드니 동네 뒤 감둔산 위에는 벌
써 눈이 하얗게 쌓여 있었다. 눈을 보니 갑자기 추위가 엄습했다. 김삿갓은 그
때까지 여름옷을 입고 있었다. 얼마를 더 가니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 눈
을 무섭게 부릅뜨고 김삿갓을 맞이했다. 천동마을 입구였다. 눈에 익은 장승은
아니었으나 30여 년 전 김삿갓이 살 때도 동구에는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
외에 여러 장승들이 어울려 서 있었다.
때마침 오른쪽 산길에서 나무를 한 짐 진 장년이 내려오더니 장승 옆에 지개
를 받쳐놓고 땀을 닦았다.
“저, 천동마을을 찾아왔는데 아직도 10여 호가 그대로 살고 있는지요?”
“지금은 인총이 불어나서 20여 호가 산답니다. 노형은 누군데 이 마을에 10
여 호가 살고 있는지를 묻소?”
“예전에 이 마을에 살았던 적이 있어서요.”
“예전에 살았다면 어릴 적에 뭐라고 불렀는지, 나는 어릴 적에 웃담에 사는
코흘리개라고 불렸는데요.”
“아, 조조! 내가 그 이름 지어줬다가 네 아버지한테 뺨을 맞은 적이 있잖아.
나 감나무집 둘째야.”
“네가 바로 감나무집 둘째로구나! 너 아직도 그 일을 기억하고 있네. 아니,
어디서 뭐하다가 이제야 고향을 찾누? 그나저나 먼 길 오느라 시장할텐데 어서
가자.”
집에 들어서자 조조는 큰아들을 시켜 친구들을 동네집으로 모이도록 심부름
을 시켰다. 동네집은 상조회에서 마련해놓고 필요할 때 쓰는 공동주택이었다.
“집이 좁아 잘 데가 없으니 잠은 동네집에서 자도록 해.”
저녁을 먹고 나가보니 10여명의 어릴적 친구들이 모여 있었다. 얼굴이 기억
나는 친구도 있고 생경한 친구도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김삿갓을 기억하고 있
었다. 김삿갓은 동네에서 유일한 양반출신으로 글공부만 하고 농사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회장을 맡고 있는 조조는 상조회 기금으로 술과 안주를 시
켜 성대한 환영회를 베풀어주었다. 환영회는 밤이 이슥해서야 마무리가 되었다.
돌아가기 위해 방문을 여니 어느새 온 천지가 흰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얼마
뒤 함께 밖으로 나갔던 조조가 되돌아왔다.
“너 여기 아주 살러 온거지?”
“아니야. 나는 정처 없이 떠다니는 몸이라 내일이라도 가봐야 해.”
“30여 년 만에 고향에 와서 그게 무슨 소리야? 정 그렇다면 이번 겨울이라
도 나고 가. 이대로 보낼 수는 없어. 얼굴만 비치고 떠날거면 뭣 하러 왔어?”
“동무들에게 너무 폐를…”
“그런 말이 어디 있어? 모두들 반가워하는 거 봤잖아. 다들 네가 동네에 뿌
리를 내리고 살기를 원해. 너 내일 떠나면 나 친구들한테 맞아 죽어. 그러니
아무 소리 말고 이번 겨울 나고 봄이나 되거든 가든지 말든지 해. 그리고 삼시
세끼는 우리 집에서 먹도록 해.”
“알았어. 참으로 고맙구나. 그런데 너한테 폐가 너무 커서 어떡하지?”
“상조회 기금으로 네 밥값을 치르기로 했으니까 그건 염려하지 마. 그리고
자네가 아직 여름옷 차림인 걸 보고 마누라가 솜옷을 한 벌 지어주기로 했으니
사양 말고 입도록 해. 내 다 짓는 대로 가져다줌세.”
동무는 역시 어릴적 동무였다. 눈은 밤새 쉬지 않고 내렸다.
다음날 , 김삿갓은 조조를 따라 온 마을을 돌아다니며 어른들께 일일이 인사
를 드렸다. 밤새 내린 눈은 무릎까지 차올랐다. 친구들은 저녁마다 동네집으로
모여들어 김삿갓의 이야기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귀를 기울였다. 10년이 넘게
세상을 돌아다닌 김삿갓의 경험담은 대대로 첩첩산중에서만 살아오고 있는 농
사꾼들의 혼을 쏙 빼놨다. 동무들의 음담패설도 김삿갓에게 신선한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술추렴은 사흘로 끝나고, 동네집은 다시 새끼를 꼬고 짚신을 삼는
원래의 기능으로 돌아갔다. 며칠 뒤 뗍떪?마누라가 만든 솜옷을 가져다주었
다. 얼굴은 투박하게 생겼어도 바느질 솜씨는 그만이었다. 동네사람들과 안면
이 트이면서 김삿갓은 노인들이 모이는 집으로 찾아가 장기와 바둑을 배우기도
했다.
한 달쯤 지난 어느 날이었다. 조조의 생일잔치를 벌인 뒤 술이 샌 몇몇 친구
들끼리 어울려 산 아래 주막으로 2차를 갔다. 천동마을에서 10리가 넘는 길이
었다. 30대 초반인 주인 수안댁은 결혼한 지 5년 만에 후사 없이 남편이 죽자
혼자서 술장사를 하고 있었다. 남편이 술독으로 죽었기 때문에 수안댁은 어떻
게든 좋은 술을 만들기 위해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비법을 배워 왔는데, 계절에
따라 빚어낸 두견주와 국화주는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을 만큼 맛이 뛰어났다.
그러나 막걸리만 마시던 촌사람들이라 솜씨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크~ 아니, 우리 고을에 이렇게 좋은 술이 있었다니 진작에 찾아올걸 그랬
네.”
초대면인 손님의 칭찬에 수안댁은 귀가 번쩍 띄었다. 처음으로 술맛을 알아
주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모두들 이미 취한 채 온 참이라 직접 얘기를 나눠
볼 기회는 없었지만, 수안댁은 그날로 김삿갓을 마음에 담아두게 되었다.
그날도 바둑을 배우러 노인들이 모이는 집으로 가려던 참이었다. 조조가 큰
아들에게 술상을 들려 동네집으로 왔다.
“수안댁이 특별히 자네 대접하라고 보낸 술일세. 지난번에 자네가 술맛을
칭찬한 뒤로 은근히 자네를 기다리는 모양일세. 지금까지 아무도 수안댁의 술
맛을 알아준 사람이 없었거든.”
김삿갓은 조조가 따라주는 술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한 모금 마셨다. 입안에
향기가 알싸하게 번지면서 목구멍을 넘어가는 술맛이 참으로 일품이었다. 저번
에 마셨던 술맛보다 월등했다. 잠시 개풍 천석사를 떠날 때 안산댁이 작별의
선물로 전해주었던 비주(秘酒)의 향취가 코끝을 스쳐갔다.
“참으로 대단한 솜씨로구먼. 내 관동 관북 경기 일대를 다니면서 좋다는 술
은 다 얻어마셔봤지만, 이처럼 맛있는 술은 작년 경기도 개풍 땅에서 딱 한 번
마셔본 뒤 처음일세.”
“자네나 하니 수안댁의 솜씨를 알아보지 평생 막걸리만 마시며 살아온 우리
네야 어디 술맛이나 제대로 아는가. 언제 시간 내서 수안댁의 주막에 다시 한
번 가보세나.”
김삿갓은 모처럼 마셔보는 가주(佳酒)에 기분이 한껏 고조되어 시를 몇 수
지었다. 술을 보내준 수안댁의 호의가 새삼 갸륵했다.
조조는 김삿갓과 수안댁을 엮어주기 위해 비밀리에 몇몇 동무들과 모의작당
을 거듭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김삿갓을 붙잡아두기 위해서였다. 김삿갓만 정
착한다면 아이들에게 글공부도 가르치고 동네에 문제가 발생할 때도 원만하게
해결해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수안댁의 의향은 이미 다짐을 받아둔 뒤였다. 며
칠 뒤 몇몇 친구들이 돈을 모아 김삿갓을 주막으로 데려갔다.
“아주머니. 여기 귀한 손님을 모시고 왔소.”
수안댁은 반색을 하며 달려 나왔다.
“아이구 삿갓선생님, 오랜만에 오셨네요. 어서 들어가세요.”
“요전에는 가주를 보내줘서 고맙게 잘 마셨네. 어디 내놔도 안 빠질 훌륭한
솜씨더군.”
“과찬의 말씀입니다. 어서 드세요, 선생님.”
동무들은 죽은 동무의 부인이니 존댓말을, 김삿갓은 주막의 주모이니 관습대
로 하대를 했지만 친구들이나 수안댁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수안댁은 한
번도 손님을 받은 적이 없는 안방으로 김삿갓과 친구 일행을 모셨다.
“안방으로 모시는 걸 보니 자넬 어지간히 좋아하는 모양일세.”
친구들이 이구동성으로 놀려댔지만 김삿갓은 덤덤하니 술상을 기다렸다.
이윽고 수안댁이 주안상을 들여오더니 김삿갓한테 먼저 잔을 올렸다.
“주모, 고맙네. 그런데 저번에 보내준 술은 무얼 어떻게 담았기에 그리 맛
이 일품인가? 내 여러 곳을 다녀봤지만 그만한 술맛은 처음이었다네.”
“그리 칭찬해주시니 고맙기 한량없습니다. 가을에 3천자가 넘는 높은 산에
서 자생하는 황국(黃鞠)을 따서 그늘에 1년 이상 말렸다가 담은 술입니다. 술
이름은 추로백(秋露白)이라고 한답니다. 이슬을 모은 물로 담그느라 딱 한 병
밖에 만들지 못했습니다. 어느 스님한테서 배운 비법으로 빚었는데, 귀한 분이
나타나면 대접하려고 오래 갈무리해왔습니다.”
“수안댁 말하는 것 좀 봐. 이제 신방만 차리면 되겠네.”
“안 그래도 삿갓선생이 수안댁과 하룻밤 자고싶다고 보채기에 이리 모셔왔
어요. 잘됐네 뭐.”
동무들의 농담에 수안댁은 얼굴을 붉히며 밖으로 달려 나갔다.
수안댁이 나가자 친구들은 본격적으로 김삿갓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어떤가, 이사람. 수안댁이 저리 자네를 좋아하는데, 그만 결혼해서 우리와
함께 살기로 하세. 자네가 있어야 우리도 아이들에게 글공부를 시켜서 까막눈
이라도 면하게 해주지. 자네가 외면하면 우리는 대를 물려 이런 무지랭이 생활
을 해야 하지 않는가.”
“우리를 봐서 그렇게 좀 해주게. 마을에 글을 깨우친 사람이 없으니 관에
무슨 일이 생기거나 이웃마을과 다툼이 일어났을 때도 말주변이 없어 늘 손해
만 보고 살아왔네.”
김삿갓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결혼을 할 수 없는 처지를 진지하게 설명했다.
“내 사생활 얘기는 안 하려고 했는데 자네들의 권고가 하도 간곡하니 설명
을 해야겠네. 자네들 말은 전적으로 알아들었네. 그러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정처 없이 떠도는 신세가 되었지만, 내게는 영월에 처자식이 있다네. 내 사정
이 이러하니 자네들이 양해해주기 바라네.”
동무들도 더는 강요하지 못하고 말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부엌문을 통해 흘
러나오는 김삿갓의 얘기를 들으면서 옷고름으로 눈물을 찍어내고 있던 수안댁
이 방으로 들어왔다.
“선생님 말씀 다 들었습니다. 더 붙잡지는 않을테니 오늘 하룻밤이라도 주무
시고 가세요. 평생 선생님을 가슴속에 묻고 살겠습니다.”
수안댁은 체면불구하고 하룻밤 동침을 애원했다. 동무들과 어울려 주막을 찾
아와 처음으로 술맛을 칭찬해준 김삿갓을 깊이 사모해왔던 것이다. 그 간곡한
요청에 친구들이 말없이 하나둘 자리를 떴다. 수안댁은 곧 술상을 치우고 비단
금침을 깔았다. 동무들이 김삿갓과 수안댁을 엮어주기 위해 주막을 다녀간 이
후 오늘을 대비하여 마련해둔 이부자리였다. 김삿갓은 10년 수절과부를 위해
온 정성을 기울여 운우지정을 쏟아부었다.
이듬해 봄, 김삿갓은 당초 예정했던 대로 정든 천동마을을 떠났다. 그 동안
수안댁의 주막에도 자주 갔었다. 수안댁은 여전히 김삿갓을 깍듯이 받들어 모
셨지만 더는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았다. 조조의 마누라는 봄옷을 한 벌 지어
떠나는 신랑의 동무에게 선물했다. 동무들은 김삿갓의 완강한 사양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두둑한 전별금을 바랑에 넣어줬다. 수안댁이 비밀을 지켜줄 것을 당
부하며 전해준 돈이었다.
秋色에 잠긴.. | 김 삿갓 2008.07.08 15:22
곡산 지경을 벗어난 김삿갓은 구월산을 향해 서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 지
방은 어딜 가나 첩첩산중이었다. 얼마를 가자니 날아갈 듯한 필체로 ‘夜夢’이
라는 옥호의 간판을 내건 객점이 나타났다. 산중 객점에 어울리지 않는 명필이
었다.
“저 야몽이라는 간판은 어느 분이 써준 것인가?”
“저게 야몽이란 글자유? 장사를 시작한 첫날 첫손님이 판때기를 하나 달라
기에 줬더니 그렇게 써서 걸어놓고는, 다음날 아침 외상을 하고 갔답니다.”
“저런 고약한 사람이 있나. 첫날 첫손님이 외상을 하면 쓰나.”
“당신이 첫손님인 줄 알고 그랬겠어요? 알았더라도 수중에 돈이 없으면 하
는 수 없는 일이지요.”
주모는 남의 말 하듯 천하태평이었다.
“그래, 외상을 했으면 나중에 와서 술값은 갚았는가?”
“아직 안 갚았는뎁쇼. 때가 되면 와서 갚겠지요.”
점입가경이었다. 김삿갓은 자신도 한 태평 한다고 자부해왔으나 산골의 일개
주모에게도 까마득히 못 미친다는 생각에 큰 깨우침을 얻었다. 김삿갓이 다섯
되 째 술을 시켰을 때였다.
“손님은 머리도 허옇게 쇠신 분이 웬 술을 그리 많이 드세요?”
“뭐? 내 머리가 허옇게 쇘다고?”
“어머나, 아직 모르고 계셨어요?”
아마도 천동마을에 사는 몇 달 사이에 갑자기 머리가 쇤 모양인데, 늘 함께
지내는 동무들로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 아무도 얘기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도 이제 늙었단 말인가? 나이 사십 줄에 이루어놓은 일도 없이 세월만
축내고 소일했단 말인가?’
“참, 손님. 그 외상손님이 저쪽 객방 벽에 뭘 하나 써 붙여놓고 갔다우. 떠
나신 뒤에야 보았는데, 글을 아시거든 한번 보시우.”
김삿갓은 주모가 건네준 등잔불을 들고 벽에 붙은 글을 읽어보았다.
鄕路千里長 고향 길은 천리 밖 멀고도 먼데
秋夜長於路 가을밤은 그 길보다 더 길구나.
家山十往來 꿈속에선 고향에 다녀왔건만
詹鷄猶未呼 깨어 보니 상굿도 새벽닭이 울기 전이네.
타향을 떠돌며 향수(鄕愁)에 젖어 하룻밤 자고 가면서 그 심경을 읊은 시인
데, 놀랍게도 ‘山雲’이라는 낙관이 찍혀 있었다. 야몽이란 바로 이 시의 제
목이었다.
“여보게 주모. 이 어른이 언제 여길 다녀가셨는가?”
“아시는 사람이우? 내가 객점을 시작한 날이니 한 7, 8년은 됐겠네요.”
“이 어른으로 말할라 치면 조선 제일의 시인이시네. 아마도 지금쯤은 돌아
가셨을지도 모르겠구먼. 저 간판과 시 잘 간직하시게. 술값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이상의 값어치가 있는 귀한 글일세.”
산운 이양연. 김삿갓이 흠모해 마지않는 풍류시인이었다. 수많은 인연이 그
렇게 세월의 거리를 두고 엇갈리는 게 인생 아니던가.
김삿갓이 구월산이 있는 은률 땅으로 접어들었을 때는 이듬해 가을이었다.
워낙 산자수명한 고을들이라 가는 곳마다 발길이 쉬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백두산 금강산 묘향산과 함께 조선의 4대 명산 중 하나인 구월산은 여덟 고을
에 둘러싸여 있는 황해도의 중심이요 상징이었다. 「삼국유사」에 겨레의 시조
인 환인 환웅 단군 3대가 모두 구월산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을 뒷받침이라도 하
듯, 구월산에는 단군대 어천석(御天石) 사왕봉(思王峰) 등의 신적(神籍)과 함
께 거석문화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그 인연으로 구월산은 아사달산 궁홀 백악
증산 삼위 서진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김삿갓은 꼭대기에 있는 천재단에 올라
참배한 뒤 구월산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단풍으로 불타는 울창한 숲에도 역사
의 숨결이 배어 있는 듯하여 방랑의 피로가 말끔히 가셨다.
산을 내려오는 길로 해주로 향했다. 해주는 황해도의 소재지로 억수로 번성
한 도회지였다. 문득 이율곡의 로맨스가 생각났다.
天姿綽約一仙娥 타고난 그 자태 선녀처럼 아름다운데
十載相知意態多 사귄 지 10년에 사연도 많았구나.
不是吾兒腸木石 너도 나도 목석이 아니건만
只緣哀弱謝芬華 몸이 약한 탓에 따먹을 수 없으니 아쉽기만 하구나.
아홉 번의 과거에 모두 장원을 차지한 조선조 최고의 천재 이율곡은 말년에
황해도 감사로 재직했는데, 열세 살 먹은 동기 유지에게 첫눈에 홀딱 반해버렸
다. 끝내주는 미색에 다양한 재능까지 갖추었으니, 병약한 율곡으로서는 환장
할 노릇이었다. 하여 매일 알몸으로 껴안고 자면서도 양물이 동하질 않아 품지
못한 안타까운 심경을 시로 달랬던 것이다.
김삿갓은 고향동무들이 넣어준 전별금으로 수양매월(首陽梅月) 두 장을 샀다.
오래 전부터 욕심을 내오던 물건이었다. 장인(匠人)으로부터 직접 산 수양매월
은 조선 최고의 먹으로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져 있었다. 수양매월은 소나무를
태워 가장 높이 올라가는 그을음인 초연(超煙)을 모아 만든 것으로, 조선의 선
비들이라면 누구나 탐을 냈지만 워낙 비싸 손에 넣기가 어려웠다. 장인은 옹진
에서 나는 돌로 손수 만든 매화연(梅花硯)을 선사하여 수양매월을 알아주는 김
삿갓의 안목에 답례했다. 조선 선비에게 벼루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황주를 거쳐 평안도로 넘어가기 직전, 김삿갓은 양도 접경에 걸쳐 있는 희환
산에 올랐다. 희환산에는 환희정(歡喜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는데, 그 아래로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오열탄(嗚咽灘)이라는 여울이 휘돌아가고 있었다. 옛날 황주
고을 선위사가 안악기생 명월과 뜨겁게 사랑하던 중 내직으로 발령을 받아 한
양으로 떠나던 날, 두 남녀가 여울 가에서 부둥켜안은 채 하염없이 흐느껴 울
었다 하여 붙인 이름이었다. 기암괴석 사이로 도도하게 흘러내리는 여울물은
스스로도 오열하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계수(溪水)가 바위에 부딪히며 일으킨
물보라는 쏟아져 내리는 햇빛을 받아 오색영롱한 무지개를 이루었는데, 계곡의
절경에 걸린 무지개는 영락없이 천상으로 올라가는 다리였다.
김삿갓은 황홀경에 취해 계곡을 거슬러 계속 올라갔다. 깎아지른 절벽이 백
척이 넘는 문성대(文星臺)에 이르자 때마침 보름달이 두둥실 떠올랐다. 문성대
아래는 3백 평은 족히 될 너럭바위가 펼쳐져 있었다. 오색단풍과 맑은 계수에
달빛이 쏟아지니 바로 선경이었다. 김삿갓은 북받쳐 오르는 감흥을 누를 길 없
어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고금을 막론하고 중국이나 조선의 선비들은
달을 특히 좋아했으니, 이태백은 취중에 달을 쫓다가 채석강에 빠져 죽지 않았
던가. 오열탄 계곡은 금강산 옥류동 계곡에 못지않은 추색(秋色)으로 물들어
있어 김삿갓의 발목을 이틀이나 더 붙잡았다.
평안도에 들어서자 김삿갓은 가장 먼저 중화고을 용암산 남쪽에 있는 동명
왕의 무덤을 찾아 참배했다. 전설에 의하면 동명왕은 40세에 하늘로 올라가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에 왕실에서는 무덤에 동명왕이 애용하던 말채찍을 대신
묻었다고 했다. 그 말채찍에는 커다란 진주구슬이 달려 있었는데, 그 때문에
동명왕의 무덤은 ‘진주묘’라고도 불렸다. 대제국의 시조답게 동명왕은 2천년
가까이 지난 조선 말엽에도 뭇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있었으니, 무덤에 백일
동안 참배하면 소원성취를 한다 하여 김삿갓이 찾아간 날도 한 노인이 열심히
참배를 드리고 있었다.
“노인장께서는 무슨 소원이 있기에 그리 간절하게 기원하십니까?”
“손자 녀석이 사랑하는 처녀가 있어 그 처녀 아니면 아무하고도 혼인을 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데, 처녀 쪽 아버지가 요지부동이라 내 매일 십리씩 걸어
와 이리 빈다오. 처녀가 워낙 미인이라 손자 녀석의 애간장을 태운답니다.”
“예. 그러시군요. 참배를 하신 지는 며칠이나 되셨습니까?”
“오늘이 아흔 일곱 번째요. 이제 사흘만 더 참배를 하면 소원이 이뤄질 것이
오.”
“예. 꼭 소원성취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근방에 하룻밤 묵어갈 만한 데가
어디 없을까요?”
“우리 집이 십리밖에 안 되니 같이 가십시다. 우리 집에서는 며칠쯤 묵어가도
괜찮소.”
김삿갓은 백배 사례하고 노인을 따라갔다.
열다섯 살인 손자가 사랑하는 낭자는 홍문관 교리를 지낸 백상(白相)의 딸인데,
당사자끼리는 이미 몇 차례 데이트 끝에 혼인언약을 해뒀다는 것이었다. 백상은
사윗감의 지체는 따지지 않고 학문으로 시험을 보아 뽑으려 하는데, 시험문제가
워낙 까다로워 지금까지 아무도 풀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누구에게나 똑
같이 세 가지를 냈다. 첫째, 아흔아홉 살 먹은 글자가 무엇인가? 둘째, 나무 중에
사람을 알아보는 글자가 무엇인가? 셋째, 겨울이 가고 다시 삼일이 지나면, 높은
데는 풀이 나고 낮은 데는 나무가 나는 글자가 무엇인가?
김삿갓은 이야기를 듣자마자 노인의 손자에게 두 문제는 즉각 정답을 알려주었
다.
“첫 번째 글자는 白 자로, 百에서 위에 있는 一을 뺐으니 아흔아홉 살 먹은 글
자 아니냐. 두 번째 글자는 相 자이니, 木에 目이 달렸으니 나무 가운데 사람을
알아보는 글자 아니야.”
“선생님, 고맙습니다. 세 번째 글자도 좀 알려주십시오.”
“세 번째 글자는 선뜻 떠오르지 않는구나. 생각 좀 해보자.”
그날부터 김삿갓은 그 집에서 기거했다. 대접은 융숭했다. 앞의 두 문제가 자
신의 이름을 해자(解字)한 것이니 세 번째 문제도 역시 자신의 이름과 관련이
있을 듯하여 김삿갓은 백상의 호를 알아오라 일렀다. 손자가 그의 호를 알아온
것은 사흘 후였다. 그 날은 바로 노인이 동명성왕 묘를 찾아가 백 일째 치성을
드린 날이었다. 백상의 호는 다원(茶園)이었다. 호를 종이 위에 써놓고 한동안
들여다보던 김삿갓은 무릎을 탁 쳤다.
“세 번째 문제의 답을 찾았다. 겨울이 갔으니 봄[春]이 아니겠느냐. 春 자에서
삼일을 빼면 무슨 자가 남느냐?”
소년은 요모조모 글자를 뜯어보더니 자신 있게 대답했다.
“人 자만 남네요.”
“그래, 人 자에 높은 데는 풀[艸]이 나고 낮은 데는 나무[木]가 나면 무슨
글자가 되느냐?”
“茶 자가 되네요.”
“그래, 세 번째 문제의 답은 바로 茶 자다. 교리어른께서는 자신의 호 다원
(茶園) 가운데 첫 글자를 세 번째 문제로 내신 것이다.”
“아이구, 삿갓선생. 선생이 아니었으면 애꿎은 우리 손자 상사병으로 죽을 번
했소이다. 이 은혜를 무엇으로 갚는단 말입니까!”
“은혜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그저 노인장의 백일기도 정성이 하늘에 닿았
나봅니다.”
“하긴 그렇지요. 동명성왕의 묘엘 가지 않았더라면 선생을 못 만났을테니 말
입니다.”
노인은 어디 가서 길일을 택해 왔다. 시험은 사흘 후에 보기로 했다. 그 동
안 김삿갓은 칙사 대접을 받았다. 손자가 시험을 보러 간 날, 노인은 주안상을
사이에 두고 김삿갓과 마주 앉아 초조하게 손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날이 저물
어 밤이 되어도 손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선생, 뭐가 잘못된 거 아닐까요?”
“걱정 마십시오. 틀림없이 합격했을겁니다.”
“그런데 왜 여태 돌아오지 않는단 말입니까?”
“교리어른의 성격이 워낙 꼬장꼬장하시다니 딸에게는 아직 알리지 않았을 것
입니다. 며칠 빌미를 뒀다가 적당할 때 자연스럽게 알리려 할테니까요. 그런데
그 집 딸은 손자가 시험 보러 온 걸 알고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릴 것 아닙니까?
손자는 처녀를 너무 사랑하는 나머지 밤이 되어 남의 눈에 띄지 않을 때 만나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고 오느라 늦을 것이니 과히 걱정하지 마시고 술이나 드십
시다.”
김삿갓의 얘기가 끝나고 조금 있다가 손자가 들어섰다. 지체한 사유는 김삿갓
이 예측한 대로였다.
“선생. 곧 택일도 하고 혼례도 치러야 하는데 저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
습니다. 더욱이 사돈댁이 학문이 높은 집안이라 격을 맞추려면 선생의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그러니 혼례를 치를 때까지만 부디 좀 머물러서 여러 가지로 보
살펴주십시오. 내 반드시 후사하리다.”
“예, 말씀 잘 알아들었습니다.”
혼례란 양반 집안이나 평민 집안이나 거기서 거기, 굳이 혼례까지 관여하지는
않아도 될 터였다. 무엇보다 사례를 하겠다는 언질이 부담스러웠다. 다음날 새벽,
김삿갓은 노인이 깨기 전에 행장을 챙겨 길을 나섰다.
매일 보는 녹수(綠水)요 매일 오르는 청산이건만, 김삿갓의 눈에는 날마다 새로
운 녹수요 새로운 청산이었다. 그래서 언제나 목적지는 정하되 일정은 멋대로였
다. 평양을 향해 느릿느릿 북쪽으로 발길을 옮기던 중 날이 저물었는데, 마침 길
가에 객점이 하나 있었다. 객점의 이름은 놀랍게도 「성인(聖人)」이었다. 필시
고사(故事)에 밝은 어느 애주가가 지어준 듯했다. 중국의 고서 「위략(魏略)」에
따르면 위나라 왕이 금주령을 내렸는데, 백성들이 밀주를 담아서는 관리들이 알아
듣지 못하도록 좋은 술은 성인, 맛이 떨어지는 술은 현인(賢人)이라는 은어로 은밀
하게 거래한 데서 나온 말이다. 조선에서도 영조 때 금주령을 내려 어기는 양반은
첩지를 거두고 평민으로 강등시키다가, 그래도 영이 안 서자 적발된 자들을 참수하
는 초강경책을 쓰기도 했었다. 술은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영물(靈物)인즉, 결
국 영조의 금주령은 백성들은 물론 사대부들로부터도 동의를 받지 못해 흐지부지되
고 말았다. 「식화지(食貨志)」라는 책에도 ‘酒百藥之長’, 즉 술은 모든 약 가운데서
으뜸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 효능은 내가 보증한다.
“주인장, 객점이름을 「성인」이라 했는데, 누가 써준거요?”
객점의 주인은 주모가 아니라 풍채가 우람한 70대 영감이었다.
“누가 써주기는, 내가 직접 썼지요. 촌구석에서 술장사나 한다고 사람 우습게
보우?”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름이 하도 이채로워서 물어본 것뿐이오.”
“내력이 있지요.”
노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술상 맞은편에 와 앉았다. 김삿갓은 무안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여 얼른 잔을 건넸다.
“오늘은 여기서 묵어갈까 하니 한잔 죽 들이켜고 천천히 얘기해보시오.”
노인은 단숨에 대접을 비우더니 이야기를 꺼냈다.
“노형도 영조 때 금주령을 내린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예, 알고 있습니다.”
“그때 내 조부께서는 조정의 하급관리로 계셨는데, 워낙에 술을 좋아하셔서
한마을 동무들과 어울려 몰래 술을 마시다가 기찰하는 순검에게 적발되어 참수
를 당하셨다오.”
“저런! 금주령을 어긴 자들을 참수했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실제 변을
당한 가족을 만나기는 처음이오.”
김삿갓은 얼른 술을 한 잔 더 권했다.
“조부가 참수된 뒤 우리 가문은 노비로 폐출되어 이 산골로 숨어들었지요. 나
는 조부께서 참수당한 것이 억울해서 나이가 들자 직접 술을 빚어 장사를 하게
됐다오. 솜씨에 어느 정도 자신이 붙은 다음에는 옥호도 「성인」으로 바꾸고
술값도 다른 데보다 얼마간 비싸게 받기 시작했다오.”
“예, 그리 하셔도 되겠소. 술맛이 아주 그만이구려.”
“오늘은 오랜만에 솜씨를 알아주는 손님을 만났으니 장사고 뭐고 같이 술이나
마십시다. 오늘 술을 공짜요.”
“아니, 그런 법은 없소. 술값은 내가 낼테니 마음 놓고 드시기나 하시오.”
실랑이 끝에 술값은 반만 내기로 절충이 되었다.
“손님은 어디로 가시는 길이오?”
“평양을 가는 길인데 딱히 볼일이 있어서는 아니고, 여기저기 방랑하는 처지
요.”
“평양은 여기서 오십 리밖에 안되니 한나절 길이지요. 평양에 가시거든 혹 내
딸아이에게 안부를 좀 전해줄 수 없겠소?”
“그러지요. 그래 연락할 곳은 알고 계시오?”
“내가 처복이 없어서 위로 아내 둘을 잃고 세 번째 얻은 마누라한테서 겨우 그
거 하날 얻었다오. 그런데 그 마누라마저 아이가 세 살 때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
지요. 그 아이가 일곱 살 때 이 주막과 맞바꾸어 평양의 한 기방 주인에게 양녀로
보냈는데, 어느 객점에서 무슨 기명을 쓰는지는 모르겠소. 어릴 때 이름은 곤옥이었
다오. 내 성이 예 가니까 예곤옥이지요.”
말이 양녀지 형편이 어려워 딸을 기녀로 팔아먹었다는 뜻이었다. 기방 주인은 그
렇게 사온 여자애들을 4~5년 키운 뒤 열 살이 넘으면 동기로 손님방에 들여보내
거금을 받고 돈 많은 한량으로 하여금 소위 ‘머리를 얹어준다’는 의식으로 숫처녀를
바치게 했으니, 요즘 같으면 주인이나 손님이나 마캉 다 미성년자 성매매로 잡혀 들
어갈 일이었다. 그러나 양반이로되 천민으로 전락하여 술장사를 하는 노인의 처지가
천하걸객인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여 야멸치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노인의 주량도 어
지간하여 두 사람은 밤이 이슥하도록 술을 마시며 세상 얘기를 나누었다
객점 「성인」에서 한나절 길인 평양을 김삿갓은 사흘이나 걸려서 대동강 나
루터에 당도했다. 평양 오는 길목에도 발목을 붙잡는 곳이 많아서였다. 조선 제
일의 기도(妓都) 평양, 예로부터 평양은 여염집 아낙보다 기생이 더 많다고 할
정도로 유명한 색향(色鄕)이었다. 고관대작들이 감사 자리를 서로 차지하려고
다툰 곳도 평양이요, 수많은 벼슬아치와 장사꾼들이 아리따운 기녀에게 넋을 빼
앗겨 가산을 탕진하고 패가망신한 곳도 평양이었다. 김삿갓은 유장하게 흘러가는
대동강을 바라보며 기대에 설레었다. 그에게 빼앗길 건 마음뿐이었으니, 두려울
것도 손해 볼 것도 없었다. 사랑도 많고 이별도 많은 대동강 위에는 아베크족들
을 태운 놀잇배가 수면을 그득 메우고 있었다.
눈을 드니 평양의 진산(鎭山) 금수산이 초행의 나그네를 손짓하고 있었고, 고
개를 돌리니 수양버들이 휘늘어진 능라도가 김삿갓을 향해 윙크하고 있었다. 예
로부터 얼마나 많은 시인묵객들이 능라도에 올라 혹은 예찬도 하고 혹은 탄식도
했던가. 개천(价川)에서 흘러드는 순천강, 양덕에서 흘러드는 비류강, 성천에서
흘러드는 서진강이 어우러져 큰 강을 이루었다 하여 이름 지은 대동강은 사시
사철 풍부한 수량을 자랑하고 있었다. 강을 건너고 나서도 김삿갓은 길을 재촉
하지 않고 강둑에 앉아 저물어가는 대동강을 하염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하나둘 놀잇배에 등불이 켜지는 장관이 펼쳐지고 있었다. 여기저
기서 사공들이 부르는 뱃노래가 불빛에 부서지며 더욱 구성지게 들렸다.
성 안에는 한양에 못지않게 인파가 붐볐다. 뒷골목으로 접어드니 허름한 객
점이 눈에 띄었다. 주모는 50줄이었는데, 퇴기인지 잔주름 속에 곱상한 용모가
얼마간 남아 있었다.
“주모. 나 술 한잔 주시오. 그리고 오늘밤에 여기서 자고 가겠소.”
“예. 그런데 방안에 선객이 있으니 함께 주무시구려.”
김삿갓은 방안에 있다는 선객을 불러냈다. 행색이 초라한 장년은 김삿갓보다
너덧 살 아래로 보였다. 김삿갓이 먼저 통성명하고 잔을 내밀었다.
“나는 황해도 옹진에 사는 강 서방입니다.”
“노형도 평양구경을 오신 모양이구려.”
“구경을 온 게 아니라 소금을 팔러 왔다가 쫄딱 망해서 고향으로 내려가는 중
이라오.”
“저런, 장사에서 큰 손해를 보신게로군요.”
“장사는 썩 잘했지요. 예년에 비해 큰돈을 벌었는데, 그만 한 기생 년에게 홀
려서 탕진을 한 것이라오.”
“그렇게 큰돈을 들였으면 정이 들어 바짓가랑이라도 붙들지 않고 어이해서 이
렇게 내쳤답니까?”
“노형은 평양기생에게 아직 한 번도 안 당해본 모양이구려. 돈 떨어지면 언제
보았냐는 듯이 아예 문도 안 열어주는 것이 평양기방의 법도라오.”
“저런 매정한 법이 있나! 그래서 지금 후회막심이겠구려.”
“후회는 않는답니다. 돈은 있다가도 없어지는 법, 평양의 일류 기생과 원 없이
즐긴 기억은 평생을 가지 않겠소. 수중에 거금이 마련되면 언제든 다시 올 작정
이오.”
참으로 욕심 없는 한량이었다. 언젠가 전라도에서 올라온 생강장수가 생강 한
배 판 돈을 몽땅 기생에게 털리고 나서 마지막으로 기생의 옥문을 그윽이 내려
다보며 지었다는 시가 떠올랐다.
遠看似馬目 멀리서 보니 말눈깔 같고
近視如膿瘡 가까이서 보니 짓물러 헌데 같네.
雨頰無一齒 두 볼에 이는 하나도 없건만
能食一船薑 생강 한 배를 잘도 씹어 삼켰구나.
“술값은 안 받을테니 잘 데 없으면 언제라도 들리시구려.”
노파는 김삿갓의 풍류에 반해 아침 일찍 길을 나서는 그에게 넌지시 추파를
던졌다.
진달래가 불같이 타오르는 모란봉은 상춘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대동강에는 놀잇배가 분주했고, 강 건너 능라도는 연두색 능수버들이 바람에
나부끼며 나그네를 유혹하고 있었다. 김삿갓은 금수산 정상을 향해 가파른 등
성이를 올라갔다. 정상에 올랐을 때는 이미 정오를 넘어 있었다. 금수산의 정
상인 을밀대에는 날아갈 듯한 사허정(四虛亭)이 서 있었다. 사허정은 사방이 탁
트였다 해서 붙인 이름인데, 누각 위에서는 한창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풍
악이 요란하고 기생들의 춤사위가 구경꾼들을 현혹했다. 가뜩이나 금수산 풍치
에 넋이 나간 김삿갓은 흥에 겨워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며 정자로 다가갔다.
“이게 무슨 잔치요?”
“평양 갑부인 임 진사의 회갑잔치라 하오.”
정자 밖에 있는 구경꾼들에게도 일일이 술과 음식을 대접하고 있었다. 그 넉
넉한 인심에 감동하여 김삿갓은 임 진사에게 다가가 축하주를 올렸다.
“수연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학수천세 하시옵소서.”
임 진사는 생면부지의 하객이 고맙기 그지없었다.
“불민한 소생을 이리 축하해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런데 나이 육십에
정신이 아득하여 귀공을 기억하지 못하겠구려. 함자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대단히 송구스럽습니다. 잔치가 하도 흥겨워 초대면인데도 축하를 아니 드
릴 수가 없었습니다. 결례를 용서하소서. 소인은 조선천지를 유리걸식하는 김
삿갓이라 하옵니다.”
임 진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삿갓선생을 이리 만나다니요! 금강산 장안사에 불공드리러 갔다가
공허 스님으로부터 삿갓선생 이야기를 듣고 진즉부터 한번 뵈었으면 했는데,
이렇게 자진해서 찾아주시니 이런 영광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얘들아! 이리
와서 인사 여쭙거라. 조선 제일의 시선 김삿갓 선생이시다.”
여덟 명의 아들딸과 배우자들, 그 아래 손주들이 차례로 큰절을 올렸다. 임
진사의 회갑연이 졸지에 김삿갓 환영연으로 바뀌었다. 구경꾼들도 돌연한 사태
에 어리둥절하며 임 진사의 깍듯한 예우를 지켜보고 있었다. 김삿갓은 주빈이
되어 진사의 청에 따라 중간 중간 적절한 시를 지어 읊어주며 양껏 술을 ?
신 뒤 잔치가 파하기를 기다려 행장을 챙겼다.
“소생 불청객으로서 과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겠나
이다.”
“은혜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선생께서 읊어주신 시로 인해 잔치가 한층 빛
났습니다. 긴히 부탁드릴 일이 있으니 누추하지만 내 집으로 함께 가시지요.”
김삿갓은 부탁할 일이 있다는 말에 거절하지 못하고 임 진사를 따라갔다.
임진사의 집은 대궐이었다. 임 진사는 김삿갓에게 별채를 통째로 내어준 뒤
그날로 열다섯 살 먹은 기생 삼월을 전속 섹스 파트너로 들여보냈다. 평생 받
아보지 못한 호강이었다. 첫날밤, 김삿갓은 장난기가 동해 짐짓 삼월을 떠보았
다.
“平壤妓生何所能? 평양 기생아, 너는 무슨 재주를 가졌느냐?”
삼월은 망설이지 않고 즉각 화답했다.
“能歌能舞又能詩.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고, 그리고 시도 잘 짓습니다.”
김삿갓은 삼월을 안고 있던 팔을 풀고 벌떡 일어났다. 알아듣기나 하겠나 싶
어 혼잣말로 흥얼거린 것이었으나 기대하지도 않았던 대구(對句)까지 돌아온 것
이다.
“네가 어찌 시에 이리 능하냐?”
김삿갓은 따라 일어나는 삼월을 덥석 안고 진하게 키스를 퍼부었다. 김삿갓은
더없이 행복한 기분으로 삼월을 안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옷은 이미 모두 이불
밖에 있었다.
“能能其中別何能? 모두 잘하는 능력 가운데 가장 잘하는 것은 무엇이냐?”
삼월은 김삿갓의 장대해진 양물을 하초로 잡아끌며 요염하게 되받았다.
“月夜三更呼夫能. 이슥한 달밤에 남정네 꼬시는 재주랍니다.”
유머 센스도 그만이었다. 그 교태에 음심(淫心)의 둑이 터져 김삿갓은 운우
(雲雨)의 파도에 몸을 실었다. ‘呼夫能’의 재주로 이미 남정네를 많이 끌어들였
던 듯, 삼월은 끝내주는 테크닉으로 김삿갓의 서툰 방아질을 한 단계 업그레이
드 시켜주었다.
부탁이 있다는 말은 김삿갓이 거절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미끼였고, 임 진
사는 매일 친구들을 초대하여 주연을 베풀어 김삿갓에게 마음껏 시를 짓고 풍
류를 즐기게 했다. 초대된 친구들도 하나같이 김삿갓의 시와 글씨에 찬탄을 금
치 못했다. 주연에는 삼월도 동참하여 노래와 춤으로 선비들의 넋을 뺐다. 주연
은 한 달간이나 지속되었다. 임진사가 평소 한 번 대접하고자 했던 평안도 일대
의 친구들을 차례로 다 불러들였던 것이다.
주연이 끝나자 김삿갓은 연인 삼월을 데리고 평양 주변의 명승지 구경에 나섰
다. 주변이 온통 절경이다 보니 빼어난 정자도 많았다. 연광정 부벽루 대동루 읍
호루 망월루 풍월루 영귀루 함벽정 쾌재정이 하루도 빼놓지 않고 김삿갓을 불러
냈다. 어린 연인이 ‘어머, 어머’ 하고 연신 탄성을 내지르며 김삿갓의 어깨와 가
슴을 토닥토닥 두드리는 가운데, 김삿갓은 웅혼한 필치로 현판에 시를 써서 선배
시인들의 현판시 곁에 내걸었다. 하루하루가 꿈이었다. 부벽루에 올라서니 강 건
너 대동강과 능라도의 원근 포치(布置)가 한 폭의 그림이었다. 김삿갓은 붓을 들
었다.
三水半落靑天外 산은 높아 아득히 하늘 밖에 솟아 있고
三水中分白鷺洲 물은 세 갈래로 모래밭을 이뤘구나.
己矣謫仙先我得 이태백이 위 두 구절을 먼저 써먹었기에
斜陽投筆下西樓 석양에 붓 던지고 부벽루를 내려가네.
일찍이 고려 선종 때 당대의 문호 황원현, 아니 김황원도 부벽루에 올랐다가
長城一面溶溶水 大野東頭點點山(긴 성곽 한 편에는 넘실대는 강물이요, 넓은 벌
동쪽에는 점점이 산이로세.) 하고는 시심이 막혀 나머지 두 구절을 완성하지 못
하고 통곡하며 부벽루를 내려오고 말았다고 했거니와, 조선의 시선 김삿갓도 결
국은 시로 풀어낼 수 없었을 정도로 부벽루의 절경은 인간의 표현력을 뛰어넘는
선경(仙境)이었다.
김삿갓은 밤잠을 줄이고 길을 재촉하여 보름 만에 홍성에 닿았다. 여정을
줄이기 위해 때를 거르기 일쑤였다. 두 끼를 굶은 채 홍성에 당도한 김삿갓은
어느 객점에 들러 이른 저녁을 시켰다. 70줄의 노인이 밥을 내왔다.
“주인장. 여기서 고암리를 가자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김삿갓은 어릴 때 한 번 어머니와 함께 외가를 다녀간지라 길이 설었다.
“왼쪽으로 가서 고개를 하나 넘으면 삼십 리 지경에 있소만, 뉘 댁을 찾아
오셨소?”
“이길원이라는 분의 댁을 찾아가는 길입니다만…”
“저런! 어디서 오시는지 소식이 닿지 않은 모양이구려. 그 분은 돌아가신
지 벌써 20년도 넘었다오. 게다가 보름 전에는 그 분이 돌아가셨을 때부터
그 댁에 와 계시던 매씨 되시는 분도 돌아가셨다던데…”
김삿갓은 하마터면 밥숟갈을 떨어뜨릴 뻔했다. 보름 전이라면 소복을 입고
꿈에 나타나 김삿갓을 부르던 바로 그날 아닌가! 그러나 애써 격정을 억눌렀다.
“손님은 그 댁과 가까운 친척이시오?”
“아, 아닙니다. 그저 먼 친척으로 인사차 한번 들릴까 했는데…”
“쯧쯧, 안됐구려.”
김삿갓은 그길로 정처 없이 길을 나섰다. 어머니와는 30여 년 전 집을 나설
때가 인연의 끝인 모양이었다. 외숙모는 외삼촌보다 먼저 세상을 뜨셨으니,
외삼촌이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내처 외가에 머물며 외사촌들을 돌보다 거기서
돌아가신 모양이었다. 새삼 찾아가 성묘를 하고 재를 지낸들 번거롭기만 할 뿐
모두가 부질없는 일 아니겠는가. 더욱이 외사촌들과 마음에도 없는 언사를
섞기가 영 내키지 않아 발길을 거둔 것이었다.
30여년을 유리걸식하며 한 번도 어머니를 모신 적이 없었지만, 어디엔가 살아
계신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을 기댈 언덕이 되었었다. 김삿갓은 어머니가 돌아
가신 충격으로 낮과 밤을 따로 구분하지 않았으며, 얻어먹는 신세일망정 끼니도
제때 챙기지 않았다. 이윽고 부여에 당도했을 때는 무덤에서 걸어나온 해골처럼
피골이 상접해 있었다. 김삿갓은 봄비를 맞으며 부소산으로 올라갔다. 어머니를
잃은 처연한 심경에 백제 멸망과 삼천궁녀의 전설이 어우러져 더욱 스산했다.
김삿갓은 삼천궁녀가 뛰어들었다는 낙화암 위 백마정에 올라 유유히 흘러가는
백마강을 내려다보며 어머니를 잃은 한을 달랬다.
김삿갓은 부소산을 내려와 객점에 들었다. 몽중몽(夢中夢)이란 이름을 가진
객점은 규모는 작았으나 밖에는 복숭아나무 밭 복판에 작은 연못을 조성해놓아
제법 운치가 있었다. 술을 시키자 서글서글하게 생긴 40대 주모가 스스로 술을
한 잔 따르며 농을 걸었다.
“못난 색시가 달밤에 갓을 쓰고 다닌다더니, 노인장께서는 늙수막에 왜 삿갓을
쓰고 다니시우?”
“이 사람아. 비도 피하고 햇빛도 피하고 꼴 보기 싫은 사람도 피하는 데는
삿갓만한 물건이 없다네. 특히나 술을 마시다 돈이 없을 때 도망가는 데는 가장
요긴한 물건이지. 삿갓만 벗으면 주모가 내 얼굴을 알아볼 턱이 없지 않은가.”
객쩍은 농담에 사람 좋은 주모가 허리를 꺾으며 웃는 바람에 김삿갓도 모처럼
온갖 시름을 잊고 파안대소했다.
“그런데 객점이름을 어째서 ‘몽중몽’이라 지었는가?”
“쇤네도 한잔 주셔야지 공으로 들으시려우?”
“이런, 미안허이. 내 술 인심이 야박하지 않은 편인데 오늘은 자네 미색에
정신이 혼미해진 듯하이.”
“오호호호호. 이 나이에 미색이라니요, 농담이라도 술맛이 절로 나겠수.”
주모는 대참에 한 잔을 죽 비우더니 간략하게 ‘몽중몽’의 유래를 설명했다.
읍내 기생으로 한창 잘나갈 때 그녀를 짝사랑하는 70객이 있었는데, 하루도
빠짐없이 기방으로 찾아와 그녀만 찾았다. 그녀가 다른 손님을 받을 때면
술좌석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며 술을 마시곤 했다. 그러나 술자리에서는
모셔도 잠자리를 같이하자는 노인의 청은 한사코 거절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 노인과 방사를 치르는 꿈을 꿨다. 그녀는 다음날로
노인을 찾아가 자진해서 몸을 허락했다. 필시 하늘의 뜻이라 여겨서였다.
그날부터 술자리가 끝나면 매일 노인의 품에 안겨 잠을 자곤 했는데, 어쩐
일인지 이후에는 노인의 양물이 서질 않았다. 그러다가 그녀가 20대 후반에
접어들어 기녀를 그만두자 노인은 이 술집을 차려주고 계속 뒤를 돌봐주었다.
‘몽중몽’은 꿈속의 인연을 생각해서 지은 이름이었다.
“그 어른은 아직 생존해계신가?”
“웬걸요. 5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어른이 돌아가시자 술장사를 중단하고
본댁과 별도로 삼년상을 치러드린 뒤 지금까지 수절하고 지낸답니다.”
“어허, 열녀로고. 이 이악한 세상에 자네처럼 신의를 존중하는 사람은 처음
이로세. 내 이 고장은 처음이지만 자네 같은 사람을 만나 참으로 감격했네.”
김삿갓은 한 잔 그득 술을 따라 주모에게 권했다.
술이 떨어지자 주모는 술상을 내가더니 새로 한 상 차려 내왔다.
“오랜만에 다 늙은 퇴기를 알아보시는 선비님을 만났으니 지금부터는 쇤네가
대접하리다. 지금부터 쇤네를 연월이라 불러주시우. 제 기명이었답니다.”
연월은 주량도 만만찮았다.
“내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며 숱한 기녀들과 술을 마셔봤지만, 자네처럼 주량이
센 여인은 처음일세그려.”
“주량이란 상대방에 따라 달라지는 거 아니겠습니까?”
마침 유장한 백마강을 배경으로 풀을 뜯던 송아지가 ‘음매~’하고 울었다.
김삿갓은 취기가 몽롱한 가운데 시심이 일어 혼잣말로 그 정경을 읊조렸다.
白馬江頭黃犢鳴 백마강 가에서 누른 송아지가 울고 있네.
연월이 제꺽 대구를 놓았다.
老人山下少年行 노인산 아래로 소년이 걸어가네.
김삿갓은 깜짝 놀랐다. 연월이 대구를 놓을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더구나 김삿갓이 白과 黃을 대조적으로 배치한 데 대해, 연월은 老와 少로
화답하지 않는가! 김삿갓은 뒤를 이어 한 구절 더 읊었다.
澤裡芙蓉深不見 연못 속의 부용꽃은 물이 깊어 보이지 않네.
園中桃李笑無聲 뜰에 있는 복사꽃은 웃어도 소리가 나지 않네.(연월)
하루에도 몇 차례씩 치르는 과한 방사(房事) 탓이었을까? 삼월이 몸살이 나서
기방으로 돌아갔다. 김삿갓은 허전한 발길로 연광정에 올랐다. 다른 누각도 마
찬가지지만 이미 여러 번 둘러본 정자였다. 덕암이라는 수백 척 낭떠러지 위에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 얹혀 있는 연광정은 올 때마다 다른 숨결, 다른 정취로
김삿갓을 반겼다. 연광정은 성종 때 평안감사로 있던 허광이 지은 정자로 평양
의 여러 누각 가운데 규모도 가장 크고 건축미도 가장 뛰어났다. 연광정은 임
진왜란 때 적진으로 잠입하여 왜장을 죽이고 순국한 평양기생 계월향이 생전에
즐겨 들리던 곳이기도 했다. 절벽 아래로는 넘실대는 대동강을 건너 능라도와
백은탄(白銀灘)이 그림처럼 어우러져 있고, 좌우에서는 대동루와 읍호루가 춘색
(春色)에 겨워 손짓하고 있었다.
김삿갓이 솟아오르는 시심을 붓으로 담아내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여인네
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는데, 간드러진 목청이 여염의 아낙네들 같지는
않았다. 김삿갓의 발길이 자신도 모르게 가락을 따라갔다. 언덕을 넘어서자 저만
치 너른 풀밭 위에서 한 무리의 여인들이 장구 장단에 맞춰 더러는 노래를 부르
고 더러는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가춘지절(佳春之節), 여인
네들이 화전놀이를 나온 모양이었다. 복색(服色)으로 보아 퇴기들인 듯했다.
“지나가는 과객인데 파흥(破興)이 안 된다면 술 한 잔 얻어먹을 수 없겠소?”
당시 기생들은 열 살 전후에 기방에 나가 남정네와 요철(凹凸)을 맞추기 시작
하여 스물이 넘으면 노기요 서른이 넘으면 퇴기라 했으니, 조선의 남정네들은
오늘날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영계를 즐겼던 모양이다. 하긴 남자나 여자나
열 살을 넘기면 이미 혼기에 접어든 것으로 치던 시대 아니던가.
“그러잖아도 남정네가 없어 흥이 시들하던 참인데 마침 잘 오셨소. 어서 오시
구려.”
좌장인 듯한 기녀가 반색을 하며 김삿갓을 맞아들였다. 노래와 춤이 이어지는
가운데 기녀들이 돌아가며 술을 권했다.
주흥이 도도해질 무렵이었다. 한쪽에서 두 기녀가 김삿갓을 흘낏거리며 소곤
대더니 한 기녀가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혹 김삿갓 선생님이 아니신지요?”
“허허,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대놓고 물으니 아니랄 수도 없구려. 맞소,
내가 바로 김삿갓이요.”
가락이 멎으며 여기저기서 동시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가무와 시화에 능한
평양기생 치고 김삿갓의 이름을 안 들어본 사람은 없었다. 술잔이 더욱 분주해
졌다. 좌장이 한쪽에 쌓여 있던 종이뭉치를 가져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저희들이 심심파적으로 시를 지었사온데, 선생님께서 한번 보시고 격려의 말
씀을 좀 해주시면 일생의 영광으로 삼겠나이다.”
언사가 극진했다. 김삿갓은 선지를 한 장씩 넘기며 시를 읽었다. 시문을 배웠
다고는 하되 모두가 운도 잘 안 맞고 맥락도 애매했다. 그 중에 단 한 수가 김
삿갓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제목은 강촌모경(江村暮景)이었다.
千絲萬縷柳垂門 실버들 수만 가지 문 앞에 휘늘어져
綠音如雲不見村 구름처럼 눈을 가려 마음을 볼 수 없네.
忽有牧童吹笛過 목동의 피리소리 그윽하게 들려오고
一江烟雨白黃昏 보슬비 내리는 강에는 황혼이 찾아오네.
“여기 강촌모경은 누가 지었소?”
한참 뜸을 들인 뒤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던 한 기녀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
리로 대답했다.
“소녀가 지었사옵니다.”
곁에서 좌장이 거들었다.
“저 아이는 죽향이라고 하는 기생이온데 시문이 뛰어납니다.”
“아닌 게 아니라 글이 참 훌륭합니다. 죽향이는 어디서 이런 훌륭한 글재주를
배웠는가?”
“어릴 때 아버지한테서 글을 깨우친 뒤 교방에 다닐 때 시문을 배웠나이다.”
죽향은 미모도 뛰어났다.
“참 훌륭한 솜씨로구나. 앞으로도 계속 갈고닦도록 하게.”
청에 의해 시도 몇 수 짓고 평양을 거쳐 간 선비들의 일화도 들려주면서 술
을 몇 잔 더 마신 김삿갓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좋은 자리 흥을 깨지나 않았는지, 참으로 미안하게 됐소. 잘 얻어먹고 갑니
다. 참, 여러분 중에 혹 예곤옥이라는 아명을 가진 기녀를 아시는 분 없소? 기
명은 모르겠소만.”
서로를 쳐다보며 의논이 분분했으나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몸살을 다스리기 위해 기방으로 돌아간 삼월이 며칠째 소식이 없자 걱정과 궁
금증이 얽혀 뒤숭숭했다. 무엇보다 그녀의 체온과 타고난 방중술이 그리워 자주
아랫도리로 손이 갔다. 그렇다고 누구에게 물어보거나 병문안을 갈 수도 없는 처
지, 답답하고 그리운 대로 제 쪽에서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도리밖에 없었다. 일
찍 조반을 들고 임진사의 별채를 막 나서려던 참이었다. 여러 번 갔던 곳이지만
평양의 절경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다투어 김삿갓에게 유혹의 손짓을 보내고 있
었다.
“삿갓어른. 손님이 찾아오셨는데요.”
쓰개치마를 둘러쓰고 문지기의 뒤를 따라온 손님은 죽향이었다. 며칠 전 연광
정 아래서 화전놀이를 하다가 김삿갓과 처음 만났던 기녀 죽향은 여염집 아낙의
차림을 하고 있었다. 수소문 끝에 찾아온 모양이었다. 김삿갓은 죽향을 반갑게
맞아 안으로 들였다.
“어인 일로 나를 찾아왔는가?”
“제가 바로 예곤옥입니다. 제 본명을 어떻게 아셨는지요?”
김삿갓은 크게 놀랐다. 여럿이 있는 데서는 차마 나서지 못한 모양인데, 생면
부지의 사람 입에서 자신의 본명이 튀어나왔으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여러 달 전에 자네 아버지를 만났는데 아명을 일러주며 평양에 가거든 꼭 좀
찾아서 안부를 전해 달라 부탁하시더구나. 이렇게 만나게 되나니 천운인 모양이
다. 아버지는 고희가 넘었는데도 아직 정정하시더라.”
“흐흐흑!”
죽향은 꿈에도 그리던 아버지 소식에 격정을 못 이겨 오열을 터뜨렸다. 김삿
갓도 측은한 눈길로 죽향을 바라보며 침묵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한동안 소리 내어 울던 죽향은 이윽고 울음을 그치고 입을 열었다.
“선생님께서는 저의 아버지를 어떻게 만나게 되셨는지요?”
“예서 50리 상거한 중화고을의 어느 산중에서 홀로 객점을 하고 계시더구나.”
“옛? 평양에서 50리요?”
놀랄 만도 했다. 지척에 살면서 오매불망 그리기만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죽
향은 다시 한 번 흐느끼기 시작했다. 얼마나 안타깝겠는가. 눈물을 거둔 죽향이
고개를 숙인 채 지나온 얘기를 시작했다.
“일곱 살 때 한 노기의 양녀로 팔려온 저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아버지를 그리
워했지만 아버지 얘기는 입에도 담을 수 없었습니다. 혹 아버지에게 도망이라도
칠까 싶어 양모가 엄히 닦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와 헤어진 게 너무 어릴
때라 성함도 잊었고 살던 동네도 몰라 혼자 숨어서 수없이 울었답니다.”
죽향은 말을 하는 도중에도 중간 중간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선생님께 간곡한 청이 하나 있습니다.”
“말해보게. 무슨 청이든 들어주지.”
“저는 평양에 끌려온 이후 한 번도 성 밖엘 나가보지 못해 혼자서는 아버지를
찾아갈 수 없습니다. 몇 해 전 양모가 죽어 이제는 맘대로 바깥출입을 할 수 있
으니, 제발 저를 아버지 계시는 곳에 좀 데려가주십시오.”
“그럼, 데려다주고말고. 20여년 만에 부녀가 상봉하는 일인데 내 무엇을 주저
하겠는가.”
“고맙습니다.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죽향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정중하게 큰절을 올렸다.
이튿날 아침 일찍, 죽향은 임 진사 댁으로 왔다. 대문 밖에는 부담마(負擔馬.
사람도 타고 짐도 싣는 말) 두 마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김삿갓은 임 진사에게
백배 사례하고 난생처음 말에 올랐다. 임 진사는 김삿갓의 사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안장에 엽전꾸러미를 두둑이 걸어주었다. 절세미인과 나란히 말을 타고
가자니 신행이라도 가는 듯하여 날아갈 것처럼 상쾌했다.
두 사람은 한나절 만에 객점에 도달했지만 사립문이 닫힌 채 인기척이 없었다.
김삿갓이 사립문을 열고 주인을 불렀으나 역시 대답이 없었다. 안방 문을 열자
제사상이 차려져 있었고, 벽에는 누가 쓴 것인지 ‘縣?學生府君神位’라는 지방이
붙어 있었다. ‘?’이란 후사가 없는 자의 지방에 붙이는 글자다.
뒤따라 들어온 죽향은 지방을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까무러쳤다. 김삿갓은 죽
향을 반듯하게 눕히고 옷고름을 느슨하게 풀어주었다. 얼마 만에 깨어난 죽향
은 까무러쳐 있던 시간보다 더 길게 울었다. 김삿갓도 부녀의 기구한 사별이 애
통하여 눈물을 흘렸다. 밤을 새워 두주를 불사하던 강건한 사람이 몇 달 사이
에 유명을 달리하다니, 노인들의 저녁약속은 믿을 게 못 된다던 옛말이 실감이
났다. 울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려 김삿갓은 죽향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을 꺼냈다.
“이보게 죽향이. 자네의 슬픔은 가늠하겠네만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마을을
찾아 아버님이 언제 돌아가셨는지, 무덤은 어디에 모셨는지 알아내서 제를 올려
야 할 것 아닌가.”
“알겠습니다, 삿갓선생님. 나가시지요.”
두 사람은 풍헌을 찾아갔다.
“그 어른이 돌아가신 건 열흘 전이었다오. 자녀가 없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장성한 딸이 있었구려.”
‘열흘만 일찍 찾아왔더라면 뵐 수 있었는데…’
죽향은 안타까움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 다시 한 번 통곡했다. 풍헌은
앞장서 무덤으로 향했다. 무덤은 객점 뒤 양지바른 곳에 모셔져 있었다. 예를
올리고 내려온 죽향은 그 길로 김삿갓과 함께 장을 다녀와 음식을 장만하기
시작했다. 이튿날 죽향은 온 마을사람들을 모두 초대하여 무덤 앞에서 성대하
게 제를 올리고는 음식을 골고루 대접했다.
“어르신들. 제 아버님을 이렇게 거두어주셔서 참으로 고맙습니다. 좀 더 일찍
찾아뵙지 못해 부끄럽고 송구스럽습니다. 속죄하는 뜻에서 지금부터 3년 동안
시묘하며 날 맞추어 제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불쌍한 소녀를 많이
좀 도와주십시오.”
동네사람들의 칭찬이 끊이지 않았다.
방에 드니 노인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더욱 스산했다.
“열흘 뒤 선생님을 평양에 모셔다드리고 몇 가지 준비를 하여 내려와야겠습
니다.”
“자네의 효성이 참으로 지극하이.”
“임종도 못한 불효자식인걸요.”
김삿갓은 죽향을 도와 열흘 동안 아침저녁으로 제를 올린 뒤 나란히 평양으로
향했다.
평양의 춘색은 여전히 김삿갓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러나 임 진사 댁으로 돌
아갈 수는 없었다. 빌린 말을 내주고 김삿갓은 하직의 말을 꺼냈다.
“평양은 어지간히 구경했으니 그만 떠날까 하네. 자네를 만나 뜻 깊은 우정을
나누었네.”
“그 무슨 섭섭한 말씀이십니까? 여기까지 오셨는데 제 집에서 며칠이라도 쉬
시다 가셔야지요. 그리고 제가 중화로 돌아간 뒤에도 계집애가 집을 지키고 있
을테니 계속 머무시면서 평양구경을 더 하다 가세요.”
김삿갓은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사흘 간 죽향의 집에서 유숙했다. 대동강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죽향의 집은 아담한 기와집이었다.
사흘 뒤였다. 죽향이 중화로 떠나기 위해 집을 나서려 하자 김삿갓도 따라 나
섰다.
“더 머물다 가세요.”
“자네 없는 평양에 무슨 낙으로 남아 있겠는가.”
죽향은 주르륵 눈물을 흘렀다. 살 한 번 섞은 적은 없지만 그새 정이 흠뻑 든
것이다. 김삿갓도 마찬가지였다. 연광정 아래 화전놀이 자리에서 그녀가 지은 시
에 마음을 뺏긴 이래 지금껏 그녀를 은근히 사모해오고 있었다. 중화고을에서 제
를 올리느라 열흘 동안 한방에서 잘 때도 상중이라 차마 어찌할 수는 없었지만,
곁에서 함께 잤다는 사실만으로도 정을 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김삿갓은 죽향
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대동강 나루터까지 나가 그녀를 전송했다. 죽향은 손수건
으로 연신 눈물을 찍어냈다. 김삿갓은 배가 떠난 뒤 북으로 발길을 돌리고 나서
야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번에는 부용꽃을 복사꽃으로, 不見을 無聲으로 받은 것이다. 아득히
강계기생 추월의 모습이 떠올라 잠시 김삿갓의 심사를 어지럽혔다.
“자네 솜씨는 가히 진랑(眞?. =황진이)을 능가하이.”
“점잖은 선비들의 주석에서 들은풍월로 익힌 재주이오니 너무 놀리지 마세요.”
이윽고 주석을 파하고 자리에 눕자 살며시 문이 열리며 연월이 들어섰다.
그녀는 선 채 사그락거리며 옷을 벗더니 이불을 들추고 김삿갓 옆으로 파고들었다.
“쇤네 퇴기라 하나 밤일은 잊지 않았습니다. 허물치 마시고 고단한 여독이나
푸셔요.”
연월은 비록 40줄이라 하나 조이는 맛은 10대를 방불케 했으며, 뭇 남정네들의
발길을 끌던 테크닉은 그예 동이 훤히 틀 때까지 한숨도 잠을 재우지 않았다. 퇴기
연월의 기막힌 기교와 환대에 끌려 몽중몽에서 닷새 동안 운우를 즐긴 김삿갓은
그녀가 장을 보러 간 사이에 술값을 셈하여 남겨두고 행장을 꾸려 길을 나섰다.
구두레나루에 오니 마침 강경 가는 배가 있어 선장의 허락을 받고 배에 올랐다.
김삿갓은 사흘 만에 강경에 도착하여 선장에게 백배 사례하고 남행을 계속했다.
익산을 거쳐 옥구에 이르렀을 때는 가을이 깊어 있었다. 그해에는 하필 전라도에
심한 흉년이 들어 밥을 얻어먹기가 억수로 힘들었다. 스무 집을 더터야 겨우 한술
얻어먹을까말까 했다. 강계를 떠날 때 추월이 바랑에 몰래 넣어놓은 노자는 바닥이
난 지 이미 오래였고, 추월이 지어준 봄옷도 헤져 쌀쌀한 가을바람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해질녘에 어느 마을에 당도하여 집집마다 하룻밤 잠자리를 청했으나
하나같이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밥은 안 주셔도 되니 잠만 좀 잡시다.”
“아무리 흉년이라도 잠만 재우고 밥을 안 줄 수는 없는 법, 이 동네는 특히 흉년이
심해 어느 집을 가도 마찬가지일게요. 저쪽 고개를 넘어가면 큰 마을 한가운데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있는데, 그 집이 김 진사 댁이오. 가근방에서는 가장 택택한 집이니
거기 가서 한번 부탁해보시오.”
김삿갓은 고단한 다리를 움직여 고개를 넘었다. 노구에 몸살기운까지 겹쳐 다리는
천근만근이었다. 김삿갓은 힘없는 손길로 김 진사 댁 대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이오?”
“지나가는 나그네인데 하룻밤 신세를 질까 하고 찾아왔습니다.”
“지금은 손님을 맞을 형편이 못되니 다른 집을 찾아보시오.”
김 진사인 듯한 주인은 김삿갓의 손에 엽전 두 냥을 쥐어주고는 돌아서 대문을
닫아걸었다. 김삿갓은 비감에 잠겨 손바닥에 놓인 엽전 두 닢을 물끄러미 들여다
보다가 시를 한 수 써서 대문에 붙여놓고 발길을 돌렸다.
沃溝金進士 옥구에 사는 김 진사
與我二分錢 내게 엽전 두 푼을 주네.
一死都無事 죽으면 이런 괄시는 안 당할 터,
平生恨有身 살아 있는 게 한이로다.
몸이 약해져서인지 이즈음엔 죽음이라는 명제가 김삿갓의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동구를 벗어나니 산 밑에 움막이 하나 있었다. 상여집이었다. 아무려면,
김삿갓은 안으로 들어가 상여 위에 몸을 눕혔다. 김삿갓은 몸살로 인한 신열에
금새 잠이 들었다.
“여보시오. 좀 일어나보시오.”
누군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김삿갓은 눈을 떴다. 문전박대를 하던 김 진사였다.
뒤에는 초롱불을 든 하인이 서 있었다. 동네 사정이 뻔하니 상여집 아니면 잘 곳이
없으리라 짐작하고 쉬 찾은 모양이었다.
“선생이 써 붙여놓은 시를 보고 부랴부랴 찾아왔소이다. 나는 이 동네에 사는
김 진사라고 하오. 요즘 거지가 하도 많다보니 내가 사람을 잘못 보고 큰 결례를
했소. 누추하지만 내 집으로 모시겠소이다.”
김삿갓은 목이 멘 채 김 진사를 따라갔다.
늦은 밥상은 진수성찬이었다. 온 고을이 흉년인 가운데도 가세가 넉넉한 집인지라
가양주(家釀酒)도 별미였다.
“선생의 시를 보고 특별히 부탁드릴 일이 떠올라 종놈을 데리고 찾아 나섰소.
다름이 아니라 내 직접 아홉 살 먹은 손자 녀석을 가르치고 있는데, 아무래도
한계가 있어 선생에게 좀 부탁할까 하오. 초대면에 무리한 부탁일지 모르나 제발
청을 받아주기 바라오. 내 사례는 넉넉히 하리다.”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이었지만 거절할 처지가 못 되었다.
“내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 체질이나 몇 달 동안이라도 맡도록 하겠소.
그러나 봄이 되면 언제 떠날지 나 자신도 모르니 그 점은 양해하기 바라오.”
겨울 한 철, 김삿갓은 성심을 다해 아이를 가르쳤다. 김 진사도 이따금 김삿갓의
강의를 들으며 연신 감탄을 내뱉었다.
봄이 왔다. 아이를 가르치며 겨울을 나는 동안 몸살도 완치되고 근력도 붙었다.
김삿갓은 아침 일찍부터 관내의 명승지를 찾아다니며 잠들어 있던 시심을 일깨우기
시작했다. 옥구는 삼한시대 때 막로국의 도읍으로 김삿갓의 발길을 붙잡는 오래된
고적지가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김삿갓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바랑을 메고 김
진사 집을 나오는 길로 영 발길을 돌렸다. 김 진사가 약속한 넉넉한 사례는 마음에만
담아두었다.
마음은 가벼운데 몸은 전 같지 않았다. 길을 걷노라니 옆구리도 결리기 시작했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자연경관보다는 지나온 일에 생각이 집중되는 심리도 생경했다.
평생 남의 신세만 지며 살아왔지만 마음먹고 못할 짓을 한 적은 없어 마음은 가벼웠다.
의협심에 역경에 처한 사람을 도와준 적도 노상 없지만은 않았다. 짐짓 조정에서
밀령을 띠고 내려온 어사 행세를 하며 권세만 믿고 민가에 패도를 행하고 재산을
갈취한 지방수령들을 혼내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발길은 어느새 전주에 이르렀다. 견훤이 일으킨 백제(후백제라는 용어는 후세
사가들이 온조의 백제와 구분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고, 견훤의 치세에는 그냥
백제로 불렀다.)의 수도 전주는 넓은 들을 끼고 있는데다, 조선조에 와서는 이성계의
본향이라 경기전이라는 이궁(離宮)을 축조해놓아 볼거리도 많았다. 김삿갓은
며칠에 걸쳐 고덕산 만경대, 모악산 귀신사와 보광사, 감영 동헌 후원의 진남루,
북촌에 있는 덕진호와 풍월정 등을 둘러보고 남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남원은 지리산 기슭에 있어 전주에서 남원까지 가는 길에는 인가가 드물었다.
김삿갓은 노숙에 솔잎도 따 먹고 풀뿌리도 캐 먹으면서 고된 행보를 계속했다.
몸은 탈진을 거듭하여 날이 갈수록 무거워졌다. 아무데나 주저앉으면 이내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잠이 들곤 했다. 예로부터 살아 있다는 것은 남의 세계에 잠시 빌붙어
있는 것이라 했다. 그러나 삶과 죽음 가운데 어느 것이 내 것이고 어느 것이
남의 것인지 굳이 구분할 건 뭐란 말인가? 죽으면 모든 게 다 無로 돌아간다지만,
살아 있다고 有한 것은 또 무엇인가? 풍찬노숙하며 김삿갓이 남원에 이른 것은
전주를 떠난 지 보름 만이었다. 김삿갓은 무거운 다리를 끌고 광한루원으로 갔다.
광한루원은 호남팔경 중 으뜸이었다. 광한루에 올라 오작교를 굽어보며 춘향과
이몽룡의 로맨스를 상기하고 있자니 여기저기서 행락객들의 흥타령이 분분했다.
김삿갓은 감흥에 겨워 고단한 신세도 잊은 채 시를 한 수 읊었다.
千里筑鞋孤客到 머나먼 천리길을 외로이 찾아드니
四時?鼓衆仙遊 신선들은 사시장철 장구 치며 노는구나.
銀河一脈連蓬島 은하는 선경에 잇닿아 있으니
未必靈區入海求 굳이 바다 속 용궁은 찾아 무엇 하리.
김삿갓이 시를 읊는 소리를 듣고 한 팀에서 술잔을 권했다. 몸이 쇄약한 데다
빈속에 술이 들어가니 일찌감치 취기가 올랐다. 김삿갓은 행락객들의 요청에
사양도 않고 잇따라 즉흥시를 읊조렸다. 더러 알아듣고 감탄하는 사람도 있고
무슨 소린지 몰라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자도 있었다. 며칠 잇달아 광한루원엘
오다 보니 일부러 초대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김삿갓은 광한루원에서 많은
시를 남겼다. 한번은 노인들의 시회에 초대받아 술을 얻어마시던 중 계화라는
노기(老妓)의 시를 듣고 그 애절함에 깜짝 놀랐다.
緻罷氷紗獨上樓 고운 비단 짜다 말고 누각에 오르니
水晶簾外桂花秋 수정 발 저편에 계수나무 꽃 피었네.
牛郞一去無消息 정든 임 떠나신 후 소식조차 끊어지니
烏鵲橋邊夜愁愁 밤마다 오작교 주변을 거닐며 수심에 잠기네.
“아니, 연인이 언제 떠났기에 그리도 애절한 노래를 부르는가?”
노기는 소녀처럼 얼굴을 붉히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떠난 지는 30년이 넘었지만 마치 어제인 듯하옵니다.”
“어허, 그 순정이 참으로 고운지고.”
문득 강계기생 추월이 떠올라 가슴이 저릿해졌다. 여러 사람이 어우러져 있는
주석에서도 내 가슴이 이리 애절할진데, 홀로 있는 추월은 얼마나 애가 탈까!
김삿갓이 광한루원을 벗어나 지리산으로 행보를 잡은 것은 가을로 접어들어서였다.
봄에서부터 한여름을 광한루에 나와 매일 이 술판 저 시회를 기웃거리며 행락객들과
어울려 소일했던 것이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500쌍의 동남동녀를 보냈다는
동방의 삼신산, 그 삼신산 가운데 하나가 바로 지리산이다. 그러나 지리산을 오르기에는
체력이 달려 김삿갓은 언저리를 돌아 진주를 향해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겼다.
강진에서 용천사를 거쳐 가지산 보림사까지, 200리 길을 오는데 보름이나 걸렸다.
어딘지는 모르지만 몸에 이상이 있어 걸음이 더뎌졌기 때문이었다. 가지산은 예로부터
‘천하의 기운에 땅에 떨어져 내를 이루고 공중에 쌓여서는 산을 이룬 곳’이라는
찬사를 받아왔을 정도로 경관이 빼어났다. 보림사는 가지산의 정기를 온통 다 받은
명찰이었다. 보림사를 한 바퀴 둘러본 김삿갓은 풀밭에 누워 피로를 달래며 한탄의
시를 읊었다.
窮達在天豈易求 잘살고 못사는 것은 천명이라 맘대로 안 되는 법
從吾所好任悠悠 나는 내 뜻대로 유유자적 살아왔네.
家鄕北望雲千里 고향하늘 바라보니 천릿길 아득한데
身勢南遊海一? 남녘을 헤매는 신세 물거품과 같도다.
掃去愁城盃作? 술잔을 비로 삼아 시름을 마캉 쓸어버리고
釣來詩句月爲鉤 달을 낚시 삼아 시를 건져 올리면서
寶林看盡龍泉又 보림사 용천사를 두루 구경하고 나니
物外閑跡共比丘 내 마음 욕심 없어 승려와 다름없네.
그로부터 10여일 뒤, 김삿갓이 화순 동복면에 있는 신석우의 집을 찾아들었을
때는 몸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로 쇠약해져 있었다. 신석우는 뒤안 초당에 거처를
마련해준 뒤 후하게 대접했다. 다음날 신석우는 김삿갓의 요청에 따라 그를 적벽
강으로 데리고 가 놀잇배를 하나 빌려주었다. 하늘은 맑고 강바람은 시원한데,
강을 둘러싸고 있는 절경은 가히 호남팔경 가운데 으뜸이라 할만 했다. 적벽강이
오죽 아름다우면 화순군수 자리를 두고 서로 오려고 다투었겠는가. 일엽편주를
타고 사방을 둘러보니 예가 바로 선계(仙界)였다.
‘아하, 여기가 내 안식처로는 적격이로구나.’
김삿갓은 배 바닥에 드러누워 두둥실 흘러가는 뭉게구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과 구름은 30여 년 전 영월 땅을 떠날 때의 그 하늘이요 그 구름이언만,
어느새 세월이 흘러 죽음을 눈앞에 둔 노년이 되었단 말인가.
지나간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강계 제일의 명기
추월이었다. 김삿갓은 추월을 떠올리자 너무나 가슴이 아려 주르르 눈물을 흘렸다.
양양 땅 어느 산골 훈장의 딸 홍련과 보낸 하룻밤도 생생했다. 방랑길에 맺은 첫
인연이었다. 첫 경험인데도 홍련은 김삿갓에게 커다란 운우지락을 안겨주었다.
금강산 장안사의 불영암에서 공허스님을 만나 시 짓기 내기를 하던 추억도
새로웠다. 초대면인데도 백년지기처럼 뜻이 통하여 몇 달간 어울려 지낸 일은
이후 두고두고 새로운 인연으로 연결되었다.
함흥기녀 소연을 만나 행복하기 그지없는 6개월을 함께 보낸 추억도 잊을 수
없었다. 10년 만에 영월 어둔리에 있는 본가에 들러 처음 만난 둘째아들에게
익균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기억은 가슴을 에었다. 그리고는 이내 방랑길에
올랐으니 어린 아들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까? 개풍 진봉산에서 철쭉꽃을
꺾으려다 벼랑에서 떨어진 일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천석사에서 요양을 하고
있을 때 반년 동안 정성껏 간호를 해준 안산댁의 정성도 잊을 수 없었다. 곡산
땅 어릴 적 살던 동네를 찾아 동무들과 겨울을 났던 일도 즐거운 추억으로
떠올랐다. 평양갑부 임진사 댁에서 동기 삼월과 뼈가 흐늘흐늘해질 정도로 즐긴
방사는 워낙 화끈하여 그 동안 가장 자주 떠오르곤 했었다.
객점을 하던 애비 일로 평양기생 죽향을 만나 함께한 시간도 흐뭇한 추억이었다.
상중이라 비록 살을 섞을 수는 없었지만 정은 누구보다 듬뿍 들었었다. 꿈에 어머니만
현신하지 않았더라면 얼마를 더 오래 머물렀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홍성까지 내려가
어머니의 부음을 확인한 일은 인생무상을 절실하게 해줬을 뿐 크게 슬프거나
허망하지는 않았다. 부여의 몽중몽이란 객점에서 퇴기 연월과 즐긴 닷새간의 추억은
마지막 일이라 가장 생생했다. 남정네 경험이 많았던 덕에 연월은 온갖 기교로 힘이
떨어진 김삿갓의 음심을 북돋워주었다. 진주에서 우연히 옛 길동무 우국지사를 만나
그의 소개로 강진 안 진사 댁에서 한겨울 신세를 진 일도 새삼스러웠다. 결국 덕분에
신석우라는 초대면의 선비를 만나 이렇게 대접을 받고 있지 않은가.
김삿갓은 회고를 마치고는 지난 일생을 조망하는 시를 읊었다.
鳥巢獸巢皆有居 새도 짐승도 제 집이 있건만
顧我平生獨自傷 나는 한평생 홀로 슬프게 살아왔네.
芒鞋竹杖路千里 짚신에 지팡이 짚고 천리길을 떠돌며
水性雲心家中方 물처럼 구름처럼 가는 곳이 내 집일세.
尤人不可怨天難 사람도 하늘도 원망할 일은 아니로되
歲暮悲懷餘寸腸 매년 해가 저물 때면 홀로 슬퍼했다네.
이후에도 시는 열네 연이나 계속되지만, 이미 우리가 따라온 발자취를 정리한
것이므로 생략한다. 시를 다 지었을 즈음에는 이미 의식이 가물가물해지고 있었다.
어느 순간, 김삿갓은 마음이 환해지는 듯한 황홀함을 느꼈다. 이승의 의식이
단절된 그의 귀에 어디선가 마지막으로 짧은 시 한 구절이 들려왔다.
乘彼白雲 저 흰 구름을 타고
羽化登仙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
때는 강화도령 철종 14년(1863) 3월 29일, 향년 57세였다
0601H
진주에 당도했을 때는 이미 가을이 깊어 낙엽이 거의 다 졌을 때였다. 김삿갓은
진주성으로 발길을 옮겨 촉석루에 올랐다. 임진왜란 최대 격전지 가운데 하나인
진주성에는 나무 한 그루 돌부리 하나에도 나라를 지키다 거룩하게 순국한 선조들의
넋이 깃들어 있었다. 김삿갓은 김시민 장군 김천일 장군 최경회 장군 황진 장군과
최경회 장군의 부인 논개 등을 회상하며 촉석루 난간에 앉아 유장하게 흘러가는
남강을 굽어보고 있었다. 그날의 비극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강에는 곱게 물든
단풍잎만 무수히 떠내려가고 있었다. 몸을 일으켜 촉석루를 둘러보니 충절의
유적지답게 선조의 넋을 기리는 수많은 현판시가 걸려 있었다.
이윽고 날이 저물어 진주성을 내려와 하룻밤 신세질 집을 찾았다. 젊은 시절에는
노숙도 마다 않았으나 이제는 찬 데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해소병으로 기침이
심하고 온 몸이 쑤시기 때문이었다.
“아니 이거, 삿갓선생 아니시오? 진주 땅에서 이렇게 만나다니 참으로 반갑소.”
10여 년 전 평양 연광정에서 한번 만난 적이 있는 이북천이었다. 나라걱정
백성걱정이 심해 김삿갓이 우국지사라는 별명을 지어준 선비였다.
“아니, 우국지사 아니시오? 여긴 어쩐 일이오?”
“나도 삿갓선생처럼 유리걸식하는 신세 아니오. 발길 따라 가는 것이지 작정하고
왔겠소?”
두 사람은 객점으로 갔다.
“평양에서 만났을 때 노형은 파사현정(破邪顯正)하는 정치가가 되겠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지금 암행어사로 내려온 것이오?”
“으하하하. 삿갓선생의 농은 여전하시구려. 애를 써봤지만 시운이 따르지 않더이다.”
우국지사는 상굿도 권력에 미련이 남아 있는 듯했다.
“우국지사께서는 어디로 갈 작정이오?”
“남해섬이 멀지 않으니 그리로 가볼까 하오. 삿갓선생은 어디로 가려 하오?”
“나는 건강이 좋지 않아 따뜻한 곳에서 겨울을 났으면 하오만, 운수객의 팔자가
마음대로 되는 게 있어야 말이지요.”
“그렇다면 강진고을로 가시지요. 안 진사라고 절친한 친구가 있는데, 내 서한을
써드릴테니 한번 가보시구려. 박대는 하지 않을 것이외다.”
“일면식도 없는데 그리 폐를 끼쳐도 될는지…”
“그 점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집안도 부유하지만 풍류를 아는 친구라
아마도 삿갓선생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을게요. 모르긴 해도 대접이 융숭할 것이외다.”
“참으로 고맙소이다. 그나저나 이제 헤어지면 다시는 못 만날 것 같으니 매우
안타깝소이다.”
김삿갓은 섭섭한 마음을 시로 읊조렸다.
素志違其卷 우리 서로 뜻한 바는 달라도
同心己白頭 마음은 같은데 벌써 백발이 되었구나.
明朝南海去 그대 내일 아침 남해로 떠나가면
江月五更秋 강산에는 어느덧 가을이 깊으리.
우국지사와 이틀 낮밤을 통음한 뒤 김삿갓은 아침 일찍 강진을 향해 길을 나섰다.
그러나 병이 깊은데다 주독이 심해 걸음이 무거웠다. 절이나 서당을 만나면 며칠씩
쉬기도 했지만 병은 점점 깊어갔다. 시름시름 강진고을 안 진사 댁에 당도한 것은
섣달 그믐께였다. 안 진사는 김삿갓이 내민 우국지사의 소개장을 읽어보더니 반색을
했다.
“어젯밤 길몽을 꾸어 무슨 좋은 일이 있을까 기대했더니 귀한 손님이 찾아주셨소이다.
어서 드시지요.”
안 진사는 김삿갓을 정중하게 사랑방으로 맞아들였다.
“선생의 존명은 익히 들었소이다. 북천이 소개장에서 몸이 편치 않으시다 했소만,
직접 뵈니 병색이 매우 우중한 것 같습니다. 아무 걱정 마시고 편히 쉬시면서 조리를
하시구려. 마침 강진은 겨울에도 큰 추위가 없으니 조리하기에는 그만입니다.”
“이거 초대면에 폐가 너무 많아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원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저 같은 천학(淺學)을 찾아주신 것만도 영광이지요.
그저 내 집이거니 하고 편하게 지내십시오.”
간단하게 반주를 곁들여 저녁을 든 뒤, 안 진사는 김삿갓을 별당으로 안내했다.
집 뒤로는 낮지만 나무가 울창한 산이요 사랑방 문을 열면 강진만이 드넓게
펼쳐져 있어 휴양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김삿갓은 오랜만에 기름진 음식에
따뜻한 잠자리를 얻어 금새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안 진사의 보살핌은
마치 부친을 모시듯 극진했다. 사랑방에서 노독(路毒)을 다스리며 며칠을 쉰 뒤,
김삿갓은 집 뒷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낮지만 산세가 험해 정상까지는 무리여서
중턱까지만 올랐는데, 중턱 편편한 곳에는 마침 망해루(望海樓)라는 정자가 서
있었다. 고려 때 축조된 것으로 올라서면 강진만이 끝까지 내려다보여 조망(眺望)이
시원했다. 숱한 시인묵객들이 거쳐 간 듯 누각에는 많은 현판시가 걸려 있었다.
때로는 안 진사와 함께 올라 술을 마시며 시를 짓기도 했다. 안 진사는 부를 자랑하지
않고 검소하며, 하인들에게도 인자하게 대하는 훌륭한 인품을 지니고 있었다. 동네
글방의 훈장이 사정이 있어 출타할 때는 대신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농사꾼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안 진사는 강진고을의 정신적 지주였다.
김삿갓이 거처하는 별당 앞에는 자그마한 연못이 있었다. 주변에는 대나무와
소나무를 정연하게 심어놓았고, 수초가 무성한 연못 안에는 여러 종류의 물고기가
노닐고 있었다. 이윽고 겨울이 가고 봄이 되니 연못에서는 개구리들이 모여 합창을
하기 시작했다. 김삿갓은 창문을 열고 개구리의 화음을 들으며 한나절을 보내기
일쑤였다. 자연이 소생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느 날은 갑자기 소나기가 퍼부었다.
김삿갓은 붓을 들었다.
斑苔碧草亂鳴蛙 방초 푸른 늪에 개구리소리 요란하고
客斷門前村路斜 인적 없는 문밖에는 시골길이 한가롭네.
山雨驟來風動竹 소나기 오고 바람 부니 대나무가 흔들리고
澤魚跳?水?荷 물고기가 뛰어오르니 연꽃이 따라 춤추네.
“시에 힘이 넘치는 걸 보니 어지간히 쾌차하신 모양이구려.”
시를 읽은 안 진사는 자기 일인 듯 반겼다. 아닌 게 아니라 몸이 많이 가벼워져
있었다.
“오늘은 날씨도 따스하고 하니 금곡사엘 좀 다녀옵시다.”
김삿갓은 안 진사를 따라 나섰다. 금곡사는 보은산에 있는 고찰이었다. 금곡사
입구에는 계곡을 사이에 두고 양편 둔덕에 집채보다 큰 바위가 마주 서 있었는데,
마치 싸움닭 두 마리가 으르릉거리며 서 있는 형상이라 예로부터 쟁계암(爭鷄岩)이라
불려오고 있었다.
“금곡사가 번창하지 못하는 것은 입구에서 닭 두 마리가 싸우고 있기 때문이랍니다.
삿갓선생께서 저들의 싸움을 좀 말려주시지요.”
김삿갓은 바랑을 내려 지필묵을 꺼냈다.
雙岩?起疑紛爭 두 바위가 마주 서서 싸우는 것 같으나
一水中流解忿心 중간에 개울이 흘러 분한 마음 풀어주네.
“역시 시선이십니다. 그리 보면 될 것을 다들 싸우고 있는 것으로만 해석했으니…”
안 진사는 크게 깨우친 듯 오래도록 고개를 끄덕였다.
금곡사가 자리 잡고 있는 보은산 자락은 남향이어서 어느새 진달래가 만발해
있었다. 온 산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진달래를 보자 각중에 깊이 잠들어 있던
방랑벽이 깨어났다. 김삿갓은 말없이 시를 한 수 써서 안 진사에게 건넸다.
遠客悠悠任病身 먼데서 온 나그네가 오래도록 병을 빙자하여
君家蒙恩且逢春 댁에 폐를 끼치며 봄을 맞게 되었소.
春來各自東西去 봄이 왔으니 동서로 뿔뿔이 헤어져야 하니
此地看花是別人 이곳 꽃구경은 다른 사람과 하시오.
“아니 이대로 떠나시려오? 아직 몸도 완쾌되지 않으셨는데…”
“그 동안 폐가 너무 컸소이다. 이만하면 쾌차했으니 떠날 때가 되었지요.”
“이거 섭섭해서 어찌합니까? 그래, 어디로 가시려오?”
“워낙 정처 없는 걸객이라 발길 닿는 대로 다니지만, 화순고을 적벽강의
봄경치가 좋다 하니 우선 거기를 먼저 들릴까 합니다.”
“그러시다면 마침 잘됐소이다. 화순군 동북면에 가시면 신석우라고, 내 막역한
동무가 있소이다. 소개장을 써드릴테니 화순에 당도하시거든 꼭 들리시오.”
전 재산이라곤 등에 짊어진 바랑 하나, 따로 행장을 차릴 것도 없었다. 김삿갓은
안진사가 써준 소개장을 들고 휘적휘적 길을 떠났다.
익산을 거쳐 옥구에 이르렀을 때는 가을이 깊어 있었다. 그해에는 하필 전라도에
심한 흉년이 들어 밥을 얻어먹기가 억수로 힘들었다. 스무 집을 더터야 겨우 한술
얻어먹을까말까 했다. 강계를 떠날 때 추월이 바랑에 몰래 넣어놓은 노자는 바닥이
난 지 이미 오래였고, 추월이 지어준 봄옷도 헤져 쌀쌀한 가을바람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해질녘에 어느 마을에 당도하여 집집마다 하룻밤 잠자리를 청했으나
하나같이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밥은 안 주셔도 되니 잠만 좀 잡시다.”
“아무리 흉년이라도 잠만 재우고 밥을 안 줄 수는 없는 법, 이 동네는 특히 흉년이
심해 어느 집을 가도 마찬가지일게요. 저쪽 고개를 넘어가면 큰 마을 한가운데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있는데, 그 집이 김 진사 댁이오. 가근방에서는 가장 택택한 집이니
거기 가서 한번 부탁해보시오.”
김삿갓은 고단한 다리를 움직여 고개를 넘었다. 노구에 몸살기운까지 겹쳐 다리는
천근만근이었다. 김삿갓은 힘없는 손길로 김 진사 댁 대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이오?”
“지나가는 나그네인데 하룻밤 신세를 질까 하고 찾아왔습니다.”
“지금은 손님을 맞을 형편이 못되니 다른 집을 찾아보시오.”
김 진사인 듯한 주인은 김삿갓의 손에 엽전 두 냥을 쥐어주고는 돌아서 대문을
닫아걸었다. 김삿갓은 비감에 잠겨 손바닥에 놓인 엽전 두 닢을 물끄러미 들여다
보다가 시를 한 수 써서 대문에 붙여놓고 발길을 돌렸다.
沃溝金進士 옥구에 사는 김 진사
與我二分錢 내게 엽전 두 푼을 주네.
一死都無事 죽으면 이런 괄시는 안 당할 터,
平生恨有身 살아 있는 게 한이로다.
몸이 약해져서인지 이즈음엔 죽음이라는 명제가 김삿갓의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동구를 벗어나니 산 밑에 움막이 하나 있었다. 상여집이었다. 아무려면,
김삿갓은 안으로 들어가 상여 위에 몸을 눕혔다. 김삿갓은 몸살로 인한 신열에
금새 잠이 들었다.
“여보시오. 좀 일어나보시오.”
누군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김삿갓은 눈을 떴다. 문전박대를 하던 김 진사였다.
뒤에는 초롱불을 든 하인이 서 있었다. 동네 사정이 뻔하니 상여집 아니면 잘 곳이
없으리라 짐작하고 쉬 찾은 모양이었다.
“선생이 써 붙여놓은 시를 보고 부랴부랴 찾아왔소이다. 나는 이 동네에 사는
김 진사라고 하오. 요즘 거지가 하도 많다보니 내가 사람을 잘못 보고 큰 결례를
했소. 누추하지만 내 집으로 모시겠소이다.”
김삿갓은 목이 멘 채 김 진사를 따라갔다.
늦은 밥상은 진수성찬이었다. 온 고을이 흉년인 가운데도 가세가 넉넉한 집인지라
가양주(家釀酒)도 별미였다.
“선생의 시를 보고 특별히 부탁드릴 일이 떠올라 종놈을 데리고 찾아 나섰소.
다름이 아니라 내 직접 아홉 살 먹은 손자 녀석을 가르치고 있는데, 아무래도
한계가 있어 선생에게 좀 부탁할까 하오. 초대면에 무리한 부탁일지 모르나 제발
청을 받아주기 바라오. 내 사례는 넉넉히 하리다.”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이었지만 거절할 처지가 못 되었다.
“내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 체질이나 몇 달 동안이라도 맡도록 하겠소.
그러나 봄이 되면 언제 떠날지 나 자신도 모르니 그 점은 양해하기 바라오.”
겨울 한 철, 김삿갓은 성심을 다해 아이를 가르쳤다. 김 진사도 이따금 김삿갓의
강의를 들으며 연신 감탄을 내뱉었다.
봄이 왔다. 아이를 가르치며 겨울을 나는 동안 몸살도 완치되고 근력도 붙었다.
김삿갓은 아침 일찍부터 관내의 명승지를 찾아다니며 잠들어 있던 시심을 일깨우기
시작했다. 옥구는 삼한시대 때 막로국의 도읍으로 김삿갓의 발길을 붙잡는 오래된
고적지가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김삿갓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바랑을 메고 김
진사 집을 나오는 길로 영 발길을 돌렸다. 김 진사가 약속한 넉넉한 사례는 마음에만
담아두었다.
마음은 가벼운데 몸은 전 같지 않았다. 길을 걷노라니 옆구리도 결리기 시작했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자연경관보다는 지나온 일에 생각이 집중되는 심리도 생경했다.
평생 남의 신세만 지며 살아왔지만 마음먹고 못할 짓을 한 적은 없어 마음은 가벼웠다.
의협심에 역경에 처한 사람을 도와준 적도 노상 없지만은 않았다. 짐짓 조정에서
밀령을 띠고 내려온 어사 행세를 하며 권세만 믿고 민가에 패도를 행하고 재산을
갈취한 지방수령들을 혼내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발길은 어느새 전주에 이르렀다. 견훤이 일으킨 백제(후백제라는 용어는 후세
사가들이 온조의 백제와 구분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고, 견훤의 치세에는 그냥
백제로 불렀다.)의 수도 전주는 넓은 들을 끼고 있는데다, 조선조에 와서는 이성계의
본향이라 경기전이라는 이궁(離宮)을 축조해놓아 볼거리도 많았다. 김삿갓은
며칠에 걸쳐 고덕산 만경대, 모악산 귀신사와 보광사, 감영 동헌 후원의 진남루,
북촌에 있는 덕진호와 풍월정 등을 둘러보고 남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남원은 지리산 기슭에 있어 전주에서 남원까지 가는 길에는 인가가 드물었다.
김삿갓은 노숙에 솔잎도 따 먹고 풀뿌리도 캐 먹으면서 고된 행보를 계속했다.
몸은 탈진을 거듭하여 날이 갈수록 무거워졌다. 아무데나 주저앉으면 이내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잠이 들곤 했다. 예로부터 살아 있다는 것은 남의 세계에 잠시 빌붙어
있는 것이라 했다. 그러나 삶과 죽음 가운데 어느 것이 내 것이고 어느 것이
남의 것인지 굳이 구분할 건 뭐란 말인가? 죽으면 모든 게 다 無로 돌아간다지만,
살아 있다고 有한 것은 또 무엇인가? 풍찬노숙하며 김삿갓이 남원에 이른 것은
전주를 떠난 지 보름 만이었다. 김삿갓은 무거운 다리를 끌고 광한루원으로 갔다.
광한루원은 호남팔경 중 으뜸이었다. 광한루에 올라 오작교를 굽어보며 춘향과
이몽룡의 로맨스를 상기하고 있자니 여기저기서 행락객들의 흥타령이 분분했다.
김삿갓은 감흥에 겨워 고단한 신세도 잊은 채 시를 한 수 읊었다.
千里筑鞋孤客到 머나먼 천리길을 외로이 찾아드니
四時?鼓衆仙遊 신선들은 사시장철 장구 치며 노는구나.
銀河一脈連蓬島 은하는 선경에 잇닿아 있으니
未必靈區入海求 굳이 바다 속 용궁은 찾아 무엇 하리.
김삿갓이 시를 읊는 소리를 듣고 한 팀에서 술잔을 권했다. 몸이 쇄약한 데다
빈속에 술이 들어가니 일찌감치 취기가 올랐다. 김삿갓은 행락객들의 요청에
사양도 않고 잇따라 즉흥시를 읊조렸다. 더러 알아듣고 감탄하는 사람도 있고
무슨 소린지 몰라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자도 있었다. 며칠 잇달아 광한루원엘
오다 보니 일부러 초대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김삿갓은 광한루원에서 많은
시를 남겼다. 한번은 노인들의 시회에 초대받아 술을 얻어마시던 중 계화라는
노기(老妓)의 시를 듣고 그 애절함에 깜짝 놀랐다.
緻罷氷紗獨上樓 고운 비단 짜다 말고 누각에 오르니
水晶簾外桂花秋 수정 발 저편에 계수나무 꽃 피었네.
牛郞一去無消息 정든 임 떠나신 후 소식조차 끊어지니
烏鵲橋邊夜愁愁 밤마다 오작교 주변을 거닐며 수심에 잠기네.
“아니, 연인이 언제 떠났기에 그리도 애절한 노래를 부르는가?”
노기는 소녀처럼 얼굴을 붉히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떠난 지는 30년이 넘었지만 마치 어제인 듯하옵니다.”
“어허, 그 순정이 참으로 고운지고.”
문득 강계기생 추월이 떠올라 가슴이 저릿해졌다. 여러 사람이 어우러져 있는
주석에서도 내 가슴이 이리 애절할진데, 홀로 있는 추월은 얼마나 애가 탈까!
김삿갓이 광한루원을 벗어나 지리산으로 행보를 잡은 것은 가을로 접어들어서였다.
봄에서부터 한여름을 광한루에 나와 매일 이 술판 저 시회를 기웃거리며 행락객들과
어울려 소일했던 것이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500쌍의 동남동녀를 보냈다는
동방의 삼신산, 그 삼신산 가운데 하나가 바로 지리산이다. 그러나 지리산을 오르기에는
체력이 달려 김삿갓은 언저리를 돌아 진주를 향해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