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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삿갓님시

김삿갓 시모음

김삿갓 시모음

 

 

내 삿갓

 

가뿐한 내 삿갓이 빈 배와 같아

한번 썼다가 사십 년 평생 쓰게 되었네.

목동은 가벼운 삿갓 차림으로 소 먹이러 나가고

어부는 갈매기 따라 삿갓으로 본색을 나타냈지.

취하면 벗어서 구경하던 꽃나무에 걸고

흥겨우면 들고서 다락에 올라 달 구경하네.

속인들의 의관은 모두 겉치장이지만

하늘 가득 비바람쳐도 나만은 걱정이 없네.

 

 

스스로 탄식하다

 

슬프다 천지간 남자들이여

내 평생을 알아줄 자가 누가 있으랴.

부평초 물결 따라 삼천리 자취가 어지럽고

거문고와 책으로 보낸 사십 년도 모두가 헛것일세.

청운은 힘으로 이루기 어려워 바라지 않았거니와

백발도 정한 이치이니 슬퍼하지 않으리라.

고향길 가던 꿈꾸다 놀라서 깨어 앉으니

삼경에 남쪽 지방 새 울음만 남쪽 가지에서 들리네.

 

죽 한 그릇

 

네 다리 소반 위에 멀건 죽 한 그릇.

하늘에 뜬 구름 그림자가 그 속에서 함께 떠도네.

주인이여, 면목이 없다고 말하지 마오.

물 속에 비치는 청산을 내 좋아한다오.

 

비를 만나 시골집에서 자다

 

굽은 나무로 서까래 만들고 처마에 먼지가 쌓였지만

그 가운데가 말만해서 겨우 몸을 들였네.

평생 동안 긴 허리를 굽히려 안했지만

이 밤에는 다리 하나도 펴기가 어렵구나.

쥐구멍으로 연기가 들어와 옻칠한 듯 검어진 데다

봉창은 또 얼마나 어두운지 날 밝는 것도 몰랐네.

그래도 하룻밤 옷 적시기는 면했으니

떠나면서 은근히 주인에게 고마워 했네.

 

주막에서

 

천릿길을 지팡이 하나에 맡겼으니

남은 엽전 일곱 푼도 오히려 많아라.

주머니 속 깊이 있으라고 다짐했건만

석양 주막에서 술을 보았으니 내 어찌하랴.

 

농가에서 자다

 

골짜기 따라 종일 가도 사람을 못 보다가

다행히도 오두막집을 강가에서 찾았네.

문을 바른 종이는 여와 시절 그대로고

방을 쓸었더니 천황씨 갑자년 먼지일세.

거무튀튀한 그릇들은 순임금이 구워냈고

불그레한 보리밥은 한나라 창고에서 묵은 것일세.

날이 밝아 주인에게 사례하고 길을 나섰지만

지난밤 겪은 일을 생각하면 입맛이 쓰구나.

 

스스로 읊다

 

겨울 소나무 외로운 주막에

한가롭게 누웠으니 별세상 사람일세.

산골짝 가까이 구름과 같이 노닐고

개울가에서 산새와 이웃하네.

하찮은 세상 일로 어찌 내 뜻을 거칠게 하랴.

시와 술로써 내 몸을 즐겁게 하리라.

달이 뜨면 옛생각도 하며

유유히 단꿈을 자주 꾸리라.

 

고향 생각

 

서쪽으로 이미 열세 고을을 지나왔건만

이곳에서는 떠나기 아쉬워 머뭇거리네.

아득한 고향을 한밤중에 생각하니

천지 산하가 천추의 나그네길일세.

지난 역사를 이야기하며 비분강개하지 마세.

영웅 호걸들도 다 백발이 되었네.

여관의 외로운 등불 아래서 또 한 해를 보내며

꿈 속에서나 고향 동산에 노닐어 보네.

 

즉흥적으로 읊다

 

내 앉은 모습이 선승 같으니 수염이 부끄러운데

오늘 밤에는 풍류도 겸하지 못했네.

등불 적막하고 고향집은 천 리인데

달빛마저 쓸쓸해 나그네 혼자 처마를 보네.

종이도 귀해 분판에 시 한 수 써놓고

소금을 안주 삼아 막걸리 한 잔 마시네.

요즘은 시도 돈 받고 파는 세상이니

오릉땅 진중자의 청렴만을 내세우지는 않으리라.

 

나를 돌아보며 우연히 짓다

 

푸른 하늘 웃으며 쳐다보니 마음이 편안하건만

세상길 돌이켜 생각하면 다시금 아득해지네.

가난하게 산다고 집사람에게 핀잔 받고

제멋대로 술 마신다고 시중 여인들에게 놀림 받네.

세상만사를 흩어지는 꽃같이 여기고

일생을 밝은 달과 벗하여 살자고 했지.

내게 주어진 팔자가 이것뿐이니

청운이 분수밖에 있음을 차츰 깨닫겠네

 

아내를 장사지내고

 

만나기는 왜 그리 늦은데다 헤어지기는 왜 그리 빠른지

기쁨을 맛보기 전에 슬픔부터 맛보았네.

제삿술은 아직도 초례 때 빚은 것이 남았고

염습옷은 시집 올 때 지은 옷 그대로 썼네.

창 앞에 심은 복숭아 나무엔 꽃이 피었고

주렴 밖 새 둥지엔 제비 한 쌍이 날아 왔는데

그대 심성도 알지 못해 장모님께 물으니

내 딸은 재덕을 겸비했다고 말씀하시네.

 

기생에게 지어 주다

 

처음 만났을 때는 어울리기 어렵더니

이제는 가장 가까운 사이가 되었네.

주선(酒仙)이 시은(市隱)과 사귀는데

이 여협객은 문장가일세.

정을 통하려는 뜻이 거의 합해지자

달그림자까지 합해서 세 모습이 새로워라.

서로 손 잡고 달빛 따라 동쪽 성곽을 거닐다가

매화꽃 떨어지듯 취해서 쓰러지네.

 

길가에서 처음 보고

 

그대가 시경 한 책을 줄줄 외우니

나그네가 길 멈추고 사랑스런 맘 일어나네.

빈 집에 밤 깊으면 사람들도 모를테니

삼경쯤 되면 반달이 지게 될거요. -김삿갓

길가에 지나가는 사람이 많아 눈 가리기 어려우니

마음 있어도 말 못해 마음이 없는 것 같소.

담 넘고 벽 뚫어 들어오기가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내 이미 농부와 불경이부 다짐했다오. -여인

 

떨어진 꽃

 

새벽에 일어나 온 산이 붉은 걸 보고 놀랐네.

가랑비 속에 피었다 가랑비 속에 지네.

끝없이 살고 싶어 바위 위에도 달라붙고

가지를 차마 떠나지 못해 바람 타고 오르기도 하네.

두견새는 푸른 산에서 슬피 울다가 그치고

제비는 진흙에 붙은 꽃잎을 차다가 그저 올라가네.

번화한 봄날이 한차례 꿈같이 지나가자

머리 흰 성남의 늙은이가 앉아서 탄식하네.

 

눈 속의 차가운 매화

 

눈 속에 핀 차가운 매화는 술에 취한 기생 같고

바람 앞에 마른 버들은 불경을 외는 중 같구나.

떨어지는 밤꽃은 삽살개의 짧은 꼬리 같고

갓 피어나는 석류꽃은 뾰족한 쥐의 귀 같구나.

 

경치를 즐기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가다가 서니

산 푸르고 바윗돌 흰데 틈틈히 꽃이 피었네.

화공으로 하여금 이 경치를 그리게 한다면

숲 속의 새소리는 어떻게 하려나.